[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2-28 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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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10분, 1시간여의 자유시간이다. 줄리엣의 집에서 나와 시장광장(Piazza delle Erbe)으로 갔다. 로마제국 시절에는 이 도시의 포럼이었다. 주변에 높지 않은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는 광장은 그리 작지도 않은데 포장을 씌운 작은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가이드는 야채시장이라고 불렀지만, 야채와 과일을 파는 가게가 몇 개 있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괴테도 로마로 가는 길에 베로나에 들렀을 때 이 광장을 구경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 주민들은 대단히 활기차게 움직인다. 특히 상점이나 장인들의 가게가 늘어서 있는 몇 개의 가로에서는 참으로 유쾌한 광경이 눈에 띈다. (…) 건물 내부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집 안까지 전부 들여다보이며,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 광장은 장이 서는 날에는 사람으로 가득 찬다. 야채와 과일은 끝이 안 보일 정도고 마늘과 양파 같은 것은 넘쳐흐른다. 종일토록 외치고, 농담을 건네고, 노래하고, 별안간에 덤벼들고, 싸움질하고, 환성을 지르고, 웃고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적었다. 활달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모습에 매료됐던 모양이다.

시장 광장의 귀퉁이 라지오네 궁전 앞에 서 있는 거친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동상에 묻는다. “너 누구니?” 기단에 보리아 칸타르 베로나(Voria Cantar Verona, 베로나를 노래하는 보리아)라고 적힌 글을 찾아 신원을 밝혀봤다. 1872년 베로나에서 태어난 로베르토 티베리오 바르바라니(Roberto Tiberio Barbarani)의 동상이다. 20세기 베로나가 낳은 이탈리아의 가장 훌륭한 시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베로나 방언을 시어로 사용했다. 시장 광장에 세운 그의 동상은 광장 중앙에 있는 베로나의 마돈나를 향하고 있다. 

광장 오른쪽으로 난 넓지 않은 도로에 들어서면 종탑이 서 있는 건물이 귀퉁이에 서 있다. 팔라쪼 델라 라지오네(Palazzo della Ragione)이다. 고대 로마시절에는 포럼 근처에 있는 개인 소유의 건물이었다. 12세기에 발생한 지진으로 베로나의 상당부분이 무너졌을 때, 코뮌이 이 지역을 소유하게 됐고, 1193년부터 이 장소에 코뮌 궁전을 지어 시의회, 소금창고, 실크 작업장 등으로 사용했다. 

14세기 후반에는 공증인 대학(College of Notaries)이 옮겨 왔다. 1405년 베니스 공화국이 베로나를 정복한 뒤로는 사법부, 감옥, 전문대학, 보건소, 회계 사무소 등으로 사용하게 됐으며, 1493 년, 시의회가 로지아 델 시뇨리 (Loggia del Signori)로 옮겨감에 따라 주요 사법기관이 자리하게 됐고, 이름도 팔라쪼 델라 라기오네(Palazzo della Ragione)로 바꾸었다. 

궁전의 건물은 ‘ㅁ’자형이고 감옥으로 사용한 흔적인 듯 1층 창문에는 쇠창살을 붙여 놓았다. 궁전의 광장쪽 구석에는 람베르티종탑(Torre dei Lamberti)이 서있다. 1172년에 건설된 84m 높이의 람베르티 탑(Torre dei Lamberti)은 1403년 번개가 떨어져 손상을 입었지만 근 50년간 복원이 미뤄졌다. 이 탑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는데, 작은 종 마랑고나(Marangona)는 시간을 알리거나 화재의 발생을 알렸고, 큰 종 렝고(Rengo)는 의회를 소집하거나 외적이 침입했을 때 사람들에게 무장하도록 울렸다. 탑의 중간에 걸려있는 시계는 1779년에 만든 것이다.

라기오네 궁전에서 나오면 왼쪽으로 그리 크지 않은 광장이 나온다. 시뇨리(Signori)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서 있는 석상은 단테 알리기에리이다. 그의 탄생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65년 5월 14일 제막한 것이다.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는 이곳에 머물렀단다. 베로나의 영주 칸 그란데의 후원을 받으며 베로나에 머물렀는데, 베로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천국부분의 절반 정도를 썼다고 한다. 단테의 석상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는 다시 광장 시장으로 나왔다. 

과일가게를 지나 프레스코벽화로 장식된 마잔티 하우스(Mazzanti House)를 구경하고는 그리스신의 조각으로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마페이 궁전(Palazzo Maffei) 앞에 이르렀다. 마페이 궁전 앞에 있는 높다란 원주 위에는 마가의 사자상이 올려져있는데 베네치아 지배시절에 세운 것이다. 마가의 사자상 앞에서 다양한 자세를 잡아가며 인증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마잔티 하우스는 16세기 초반 알베르토 이 델라 스칼라가 소유한 도무스 브라도룸(Domus Bladorum)이라고 부르는 곡물창고였다. 당시에는 집의 외벽을 장식하는 풍습이 있어 집주인의 명성을 나타냈다. 14세기 초에는 직물, 기하학 무늬, 벽돌, 대리석 등을 이용해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나타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베로나는 우르부스 픽타(Urbus picta, 페인트칠한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300여개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마잔티 하우스의 외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가운데 부분은 알베르토 카발리(Alberto Cavalli)가 그린 것으로 질투, 무지, 선함의 지배를 우화한 것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라 할 분수대가 있다. 칸시뇨리오 델라 스칼라(Cansignorio della Scala)가 1368년에 제작한 것이다. 분수대 위에 서있는 마돈나 베로나(Madonna Verona)는 서기 380년 무렵 로마시절에 만들어졌다. 카펠로 거리 쪽으로 또 하나의 기둥이 서 있는데, 14세기에 만든 것으로 성모와 제노(Zeno), 베드로(Peter) 그리고 크리스토퍼(Christopher) 성인들에게 구원을 비는 작은 신전이다.

시장의 한 복판에는 트리부나(Tribuna)라고 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닫집이 있다. 이곳은 주두(capitello) 혹은 형틀(Berlina)이라고도 했는데, 네 개의 기둥을 세운 정방형의 구조에 피라미드 모양의 천정을 얹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이 장소는 시장을 감시하는 곳으로 누군가를 속인 자는 쇠사슬로 묶여 이곳으로 끌려와, 호민관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시장광장에 좌판을 펼친 가게에서 팔고 있는 과일들이 너무 싱싱하고 맛있어 보여 복숭아를 6개나 샀다. 그리고 다시 줄리엣의 집 쪽으로 이동해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갈증도 나고, 달달한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베로나의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는 가이드의 귀띔도 한 몫을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다리도 쉬고 화장실도 다녀 온 다음 약속시간에 맞춰 아레나로 돌아갔다. 단체 여행에서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식당에 도착한 것은 12시 전이었지만, 밀라노까지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이른 점심을 먹었다. 먼저 파스타와 샐러드가 나왔고 오징어 튀김이 주 메뉴였다. 오징어튀김이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식사를 모두 마친 12시40분에 밀라노로 출발했다. 오전 내내 도심을 걸으면서 구경을 한 탓인지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바로 곤하게 잠들어 깨어보니 1시간이 지났다. 버스의 오른쪽 창밖 멀리 알프스 연봉이 이어진다. 2시반경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민다.

밀라노는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2012년 9월에 이탈리아 북쪽 마조레 호숫가에 있는 스트레사(Stresa)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면서 하루 짬을 내 밀라노를 구경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발칸을 여행할 때 베네치아를 구경하고 밀라노에서 귀국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그때는 밀라노에서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밀라노(Milano)는 이탈리아 북부 최대 도시이자,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이루는 알프스산맥의 남쪽 코티아 알프스(Cottian Alps)의 북서쪽에 있는 발포(Val Po)의 꼭대기에 있는 평편한 언덕 피안 델 레(Pian del Re)에서 기원해 이탈리아의 북부를 가로질러 베네치아의 아래쪽 아드리아해로 흘러든다. 포강은 총길이 682㎞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강이며,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다뉴브, 라인, 론, 드네프르에 이어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길다.

포강 유역에 있는 밀라노는 2018년 기준 137만명이 거주하며, 광역시로 확대하면 324만명이 산다. 시내인구만 따지면 로마가 많지만 광역인구로 따지면 이탈리아 최대 도시다. 인구의 13.9%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국제도시, 혹은 다국적 도시라고도 한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행정수도라고 하면 밀라노는 경제수도라 할 정도다. 

주요 은행의 본점, 대기업의 본사가 집중돼있을 뿐 아니라 중앙 주식시장도 밀라노에 있다. 밀라노 시 외곽에서 알프스 산맥 자락에 이르기까지 기계, 섬유, 의약, 자동차 등 많은 분야의 공장들이 들어서 제조업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밀라노는 세계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음악, 스포츠, 문학, 예술, 미디어의 중심이기도 하다. 

기원전 400년 무렵 켈트족과 인스부레스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기원전 222년에 로마제국이 점령했으며, 기원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1세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402년 서로마 제국이 라벤나로 이전한 뒤, 452년에는 훈족이 밀라노를 점령했고, 이후 비잔틴 제국과 동고트족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도시가 파괴되었다. 569년에는 롬바르드족이 밀라노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다. 774년에는 샤를마뉴 대제가 밀라노를 점령해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1162년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1세 황제의 침략으로 밀라노는 대부분 파괴됐다. 

이를 계기로 1167년에는 롬바르디아 평원의 도시국가들이 뭉쳐 롬바르디아동맹을 창설해 외세의 침략에 대처했다. 1277년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의 영주로 추대돼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1395년에는 공작으로 임명됐다. 1477년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 후손이 없어 밀라노의 통치권은 스포르차에게 넘어갔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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