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02 0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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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포르차가문의 밀라노 지배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5세기 말 훗날 프랑스의 왕이 되는 오를레앙의 루이(Louis of Orléans)는 할머니가 비스콘티가문이었다면서 밀라노공국에 대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침공했다. 밀라노는 결국 프랑스 차지가 됐지만, 1525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가 파비아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밀라노를 포함한 북부 이탈리아가 스페인에 귀속됐다.

1700년 카를로스 2세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 부르봉가문의 필리페 5세에게 왕위가 넘어간 뒤에 1706년 라밀리와 토리노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패하면서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제국으로 넘어갔다. 1848년 밀라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의 반기를 들고 사르데냐왕국과 힘을 합쳐 합스부르크에 반기를 들었고, 1859년 솔페리노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밀라노와 롬바르디아는 사르데냐왕국에 편입됐다가 1861년 이탈리아왕국으로 통합됐다.

도로 사정이 좋아서 3시 무렵 밀라노에 도착했다. 스포르차 성 부근에서 버스를 내렸다. 성벽이 견고해 보이는 것은 외침이 잦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스포르차성은 1450년 공화정체제를 무너뜨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가 무너진 성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의 성은 밀라노의 영주였던 갈레아쪼 비스콘티 2세(Galeazzo II Visconti)의 명령으로 1358년부터 1370년 사이에 지어졌다. 

카스텔로 디 포르타 지오바(Castello di Porta Giova) 혹은 포르타 주비아(Porta Zubia)라고 부른 성은 후계자들에 의해 네 귀퉁이에 망루를 두고 한 변의 길이가 200m에 달하는 성곽으로 확대됐다. 성곽의 두께가 7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성은 비스콘티 가문 출신의 밀라노 영주가 살았다. 하지만 비스콘티가문의 맥이 끊어진 1447년에 잠시 밀라노를 지배한 골든 암브로시안 공화정 시절 성이 파괴됐던 것이다.

성 입구에 있는 중앙탑은 1452년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라레테(Filarete)가 지은 것이다. 1494년 밀라노 영주가 된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는 수많은 예술가를 불러들여 성을 장식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제날레(Zenale), 베르나르디노 부티오네(Bernardino Butinone) 등과 공동 작업으로 성의 여러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하지만 스포르차가문이 몰락한 뒤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 등의 군대에 의해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스페인 지배시절 1,000명에서 3,000명에 달하는 군대가 주둔하면서 5각형이던 요새를 강화하면서 별모양의 6각형으로 만들고 12개의 능보를 추가했다. 요새 외부의 길이는 3㎞에 달했고, 면적은 25.9헥타르에 이르렀다. 

망루에는 어린이를 잡아먹고 있는 뱀을 새긴 조각이 걸려있다. 비쇼네(Biscione)라고 하는 이 형상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역할을 하는 하늘빛 뱀을 은빛으로 나타내는 문장(紋章)적인 표현으로 비페라(vipera)라고도 한다. 대개는 왕관을 쓴 뱀이 어린이를 잡아먹고 있는 형상이나 때로는 무어인 혹은 오스만 투르크 사람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짐승을 의미하는 라틴어 베스티아(bestia)에서 파생된 비스티아(bistia)에서 유래한 것으로 풀뱀을 의미하는 여성형 이탈리아어 비샤(biscia)를 남성형으로 강화한 단어다. 11세기 무렵부터 밀라노의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의 상징이었다. 비스콘티가문에 이어 밀라노의 영주가 된 스포르차가문이 문장에 포함시켰다.

성안에는 다양한 박물관이 들어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트리불지오 마돈나(Trivulzio Madonna)를 비롯하여 카날레토(Canaletto), 티에폴로(Tiepolo), 빈첸조 포파(Vincenzo Foppa), 티티아노(Titian), 틴토레토(Tintoretto) 등의 걸작을 소장하고 있는 스포르차성 갤러리(Pinacoteca del Castello Sforzesco)가 있고, 악기 박물관, 이집트 박물관, 선사시대 유물을 소장한 밀라노 고고학 박물관, 미켈란젤로가 남긴 마지막 조각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를 소장한 론다니니 피에타(Rioanini Pietà) 박물관이 있다. 

그밖에도 병기고, 태피스트리룸과 장례식 기념물을 소장한 고대미술 박물관, 골동품 가구와 나무 조각 박물관이 있다. 그런가하면 트리불지아나(Trivulziana) 도서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코덱스 트리불지아누스(Codex Trivulzianus) 원고가 소장돼있다. 볼거리가 너무 많은데 일정을 맞출 수 없어 그냥 외관만 보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성 앞을 지나가면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이다.

길을 건너면 가리발디장군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지역은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건물 사이에 밀라노 두오모의 첨탑이 고개를 내민다. 이윽고 두오모 앞 광장에 이르렀다. 정말 사람들이 많다. 밀라노에서 예정된 일정은 불과 두어 시간 정도인 모양이다. 두오모,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를 거쳐 라 스칼라좌까지 걸으면서 개략적인 설명을 들은 다음, 자유 시간을 얻었다. 

흔히 라 스칼라(La Scala)라고 부르는 밀라노의 오페라하우스는 공식명칭이 테아또르 알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이다. 1778년 8월 3일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가 작곡한 오페라 ‘인정받은 에우로파(Europa riconosciuta)’의 초연을 개막공연으로 문을 열었다. 개관 당시의 이름은 새로운 왕립 스칼라 극장(Nuovo Regio Ducale Teatro alla Scala)이었다. 

1776년 밀라노의 축제가 끝난 2월 25일 발생한 화재로 이전의 왕립극장(Teatro Regio Ducale) 소실됐다. 이때 극장에 개인좌석을 가지고 있는 밀라노의 부자 90명이 오스트리아-에스테의 페르디난드 대공에서 새로운 극장의 건설을 요구했다. 하지만 주세페 피에르마리니(Giuseppe Piermarini)의 설계를 롬바르디의 주지사가 건축을 거부했다.

1776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두 번째 계획을 받아들여 건설이 시작됐다. 새 극장은 산타 마리아 알라 스칼라(Santa Maria alla Scala) 교회를 헐고 지었다. 2년 뒤에 완공된 극장에는 6개 층에 걸쳐 678개의 칸막이로 나뉜 개인 관람석과 일반인을 위한 2개의 갤러리에 만든 관람석 등 3000명 이상이 입장할 수 있었다. 무대는 깊이가 16.15m 폭이 20.4m 높이 26m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무대 가운데 하나이다. 무대에 설치된 84개의 오일 램프와 극장 곳곳에 설치된 천개의 램프가 무대를 밝혔다. 

건축비용은 호사스럽게 꾸민 좌석을 판매하여 충당했다. 1907년에 원래의 구조를 바꾸어 지금은 1,987석 규모로 축소됐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오페라 예술가는 물론 세계 각국의 유명 가수 대부분이 라 스칼라 무대에 섰다. 라 스칼라는 세계의 주요 오페라 및 발레 극장의 하나로 라 스칼라 극장 합창단, 라 스칼라 극장 발레단 및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가 있다. 라 스칼라는 오페라 시즌에나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라 스칼라의 길 건너에 있는 스칼라 광장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서 있다. 1856년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in Brera)는 다 빈치의 기념물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공모에 들어갔다. 2년 뒤 피에트로 마그니(Pietro Magni)의 설계가 뽑혀 제작에 들어갔고, 스칼라 광장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제작비가 문제가 돼 미뤄지다가 결국 1872년 2차 국가박람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에 의해 제막됐다.

다 빈치 석상 아래 좌대의 네 귀퉁이에는 다 빈치의 제자 4명의 입상을 세웠는데, 앞쪽에서 보면 왼쪽이 마르코 도기오노(Marco d'Oggiono), 오른쪽이 체사레 다 세스토(Cesare da Sesto)이며, 뒤쪽에서 보면 왼쪽이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Giovanni Antonio Boltraffio), 오른쪽은 안드레아 살라이노(Andrea Salaino)이다. 

석상들은 카라라 대리석으로 제작했으며, 바베노(Baveno)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든 좌대의 4면에는 다빈치가 경지를 이룬 회화, 조각, 엔지니어링 그리고 건축 등 4개의 분야를 돋을새김으로 묘사했다. 다 빈치 석상의 배경이 되는 건물은 마리노 궁전( Palazzo Marino)으로 밀라노 시청건물이다. 다 빈치의 석상 주변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벤치가 놓여있어 구경에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는 루도비코 일 모로(Duke Ludovico il Moro) 공작의 부름을 받고 1482~1499년과 1506~1513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일했다. 그 기간 동안 스포르차 성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1494년부터 1496년 사이에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레지(Santa Maria delle Grazie) 교회의 복도의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의 마지막 저녁식사 장면을 묘사한 대형 벽화이다. 그밖에도 다르세나로부터 밀라노를 거쳐 북쪽의 나빌리오 마르테사나(Naviglio Martesana)까지 항해할 수 있는, 소위 콘카 디 비아렌나(Conca di Viarenna)라고 하는 운하체계의 잠금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이룩한 많은 업적은 추앙받아 마땅했을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한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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