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05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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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발치에서 라 스칼라를 일별하고는 갔던 길을 되짚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로 다시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이다. 이 건물은 1861년 설계돼 1865년부터 1867년 사이에 쥐세페 멩고니(Giuseppe Mengoni)의 감독으로 건축됐다.

갤러리아는 두오모광장과 스칼라광장 사이에 위치하는 상가로 두 개의 커다란 통로가 중앙에서 교차하는 구조다. 두 통로가 만나는 상가의 중심은 8각형으로 돼있다. 두 개의 커다란 통로는 유리로 된 아치형의 천정을 두었다. 천정은 폭이 14.5m, 높이가 8.5m이며, 중앙의 팔각형 공간에는 내부지름 37.5m, 높이 17.1m의 커다란 돔을 올렸다. 

통로의 천정은 철골구조에 유리를 씌운 것으로 19세기 유리로 된 아케이드들 가운데 가장 진화한 형식이다. 1847년에 브뤼셀의 세인트-휴버트 갤러리를 시작으로 런던의 벌링턴 아케이드, 1848년 개관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파사지, 1890년에 개관한 나폴리 갤러리아 움베르토, 부다페스트 갤러리아 등이 유리돔을 올린 대표적인 상가건물이다.

중앙의 교차로의 바닥에는 토리노, 피렌체, 로마 등 3개의 이탈리아 왕국에 밀라노를 더한 4개 도시의 문장을 모자이크로 새겨 넣었다. 그 중에 토리노의 문장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장에 들어있는 황소의 고환을 발뒤꿈치로 밟고 세 번 돌리면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6년 전에 밀라노에 왔을 때는 필자 역시 황소고환을 밟고 세 바퀴를 돌았다. 이렇게 하면 밀라노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밀라노에 다시 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황소를 두 번씩 괴롭히기도 무엇해서 필자는 하지 않았지만, 큰 아이에게는 황소고환을 밟아보라 권했다.

갤러리아는 밀라노의 응접실(salotto di Milano)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보석, 옷, 가죽제품 등의 명품가게를 비롯해 책과 그림을 파는 가게, 레스토랑, 카페, 바, 심지어 호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명품가게들도 들어가 보았는데, 명품에 대한 안목이 없는 필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다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서울보다 먼저 나온 신상품은 없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밀라노 두오모를 구경할 차례다. 밀라노 대성당은 바티칸시국의 성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 브라질의 아파레시다(Aparecida)에 있는 성모의 국립신전 대성당(The 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of Our Lady of Aparecida),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세비야 대성당(Seville Cathedral)에 이어 세상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지금의 밀라노 대성당은 1386년 공사를 시작해 1965년 1월 6일 최종 완공됐다. 무려 600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밀라노 대성당 자리는 로마제국 시절의 옛 밀라노였던 메디오라눔(Mediolanum)의 중심이었던 로만 포럼에 면한 자리였다. 335년까지 있던 규모가 작은 8각형 세례교회인 바티스테로 팔레오크리스티아노(Battistero Paleocristiano)에 더해 355년 테클라(Thecla) 성인에게 헌정된 바실리카 노바(basilica nova, 새성당)가 세워졌다.

836년에는 인접한 장소에 또 다른 성당을 세웠다. 1075년 큰 화재가 발생해 대성당과 성당을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세례교회는 화마를 피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대성당 지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대성당을 지은 것이다.

1386년 안토니오 다 살루쪼(Antonio da Saluzzo) 대주교가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대주교의 사촌인 기안 갈레아쪼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가 밀라노의 권력을 승계한 시점이다. 전임자였던 바나보(Barnabò)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고통 받았던 노동계급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대성당 건설을 위해 대주교의 궁전, 오르디 나리 궁전, 그리고 성 스테판 세례당 등 세 개의 주요 건물이 철거됐다.

대성당 건축을 시작할 무렵에는 당시 유럽건축의 추세였던 프랑스풍의 라요난트 고딕(Rayonnant Gothic) 양식을 취했다. 하지만 1564년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가 밀라노 대주교로 취임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보로메오는 20년에 걸쳐 밀라노 대주교와 추기경을 지냈다. 그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성 네리와 함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반개혁운동을 주도했다. 보로메오는 성당 안에 있는 비스콘티가문의 무덤 등을 모두 없애버리고, 펠레그리노(Pellegrino)를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건축양식에도 달라졌다.

그들은 고딕양식을 버리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자연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1649년 새로운 건축가로 임명된 카를로 부찌(Carlo Buzzi)는 이미 고딕양식으로 완성됐던 2개의 거대한 종탑을 비롯한 석조물들을 포함해 남은 건축물을 원래의 고딕양식으로 다시금 바꾸기로 했다.

수백 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되다보니 건축책임자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향에 대한 사람들 반응도 다양하다. 고딕부흥운동이 일 무렵의 낭만주의자들은 ‘고딕에 대한 열정이 처음으로 강하게 반영됐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대성당의 건축이 ‘세계의 모든 양식을 훔치고 또 모든 양식을 망가뜨렸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구조는 특별히 흥미롭거나, 논리적이거나, 심지어는 아름답지도 않지만, 아주 기이하고 풍부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너무 웅대하고 너무 엄숙하고 광대합니다! 그리고 너무 섬세하고 비현실적이며 너무 우아합니다!”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대성당은 끔찍한 실패작입니다. 겉모습은 괴물 같고 비예술적이다. 지나치게 정교한 세부사항은 높이 걸려있어 제대로 들여다 볼 수도 없다”고 했다. 건축 역시 문학이나 미술과 다를 바 없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존 러스킨을 좋아하는 필자이지만 밀라노 대성당을 본 느낌은 마크 트웨인과 같은 생각이다.

1762년에는 밀라노 대성당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된 108.5m 높이의 마돈나 동상(Madonnina)의 첨탑이 완성됐다. 전통적으로 밀라노에 있는 어떤 건물도 마돈나 동상보다 높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 건축가 죠반니 폰티(Giovanni Ponti)가 127.1m 높이의 피렐리(Pirellig) 빌딩을 지었을 때, 건물꼭대기에 마돈나의 작은 복제물을 세운 이후로 밀라노에서 대성당의 마돈나 동상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면 마돈나 동상의 복제물을 세우는 것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밀라노 대성당을 얼짱 각도에서 찍어야 잘 보인다는 것이다. 정면에서는 파사드를 구성하는 첨탑에 섞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성당의 왼쪽으로 돌아가면 지붕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물론 돈을 내야 한다. 성당 지붕에 올라가면 무수한 첨탑이 숲을 이룬 장관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한번 보면 다른 것들이 시시해보일 수도 있다. 

갤러리아에서 두오모광장으로 나가면 우선 대성당의 전체ㅊ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진다. 화면에 넘치는 대성당의 모습에 압도돼 조금씩 물러나게 된다. 결국 광장 끝에 서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까지 가야 겨우 대성당의 모습을 화면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그곳도 이미 대성당을 배경으로 하여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넘친다. 사람들 생각은 모두 비슷하다.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은 손톱에 있는 초승달 무늬 크기보다도 작게 보인다. 그만큼 대성당의 규모가 엄청나다.

이제는 대성당의 정면으로 나아가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을 감상한다. 파사드에는 모두 3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1965년에 완성된 중앙의 출입문은 대성당의 건축을 마감하는 의미가 있다. 파사드의 대리석 벽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천사, 사자, 독수리 그리고 소를 새긴 장면을 비롯해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새겨 넣었다. 

양쪽의 출입문에는 대성당으로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미리 예매를 해야 입장이 가능한 모양이다. 6년 전에 왔을 때는 금속탐지를 받아야 했지만 무료입장이었는데, 이곳도 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당에 입장하면 4개의 통로가 있는 회중석을 지나 주랑(transept)을 거쳐 합창단석과 애프스에 이르게 된다. 본당의 높이는 45m인데, 24.5m 높이의 기둥 40개가 천정을 받치고 있다. 애프스의 창문은 20.7 x 8.5m 이다. 

오른쪽 제단 가까이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바르돌로뮤 플라예(Bartholomew Flayed) 성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권력자 혹은 대주교들의 석관 등 기념물이 다수 보관돼있고, 본당 기둥 사이에는 많은 그림들이 걸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이번에는 대성당을 한 바퀴 돌면서 외관이라도 꼼꼼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대성당의 보수작업은 6년 전과 같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듯 곳곳에 비계가 설치돼있었다. 대성당 오른편에 있는 박물관에서는 기획전이 있는 듯했지만, 자유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대성당의 측면이나 뒷면은 전면보다는 간결한 편이나 역시 정교한 모습이다.

대성당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으로 돌아가 아예 앉았다. 구경하느라 지친 다리도 쉬고,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에 따라 조금씩 붉은 빛이 떠오르는 대성당의 파사드를 지켜보기 위해서다. 보면 볼수록 사각형 무늬가 들어있는 커다란 대리석을 짜 맞춰 세운 장인들의 솜씨가 참 대단하다.

5시 10분에 모여 온 길을 되짚어 저녁을 먹으러 갔다. 20여분쯤 달린 버스가 선 곳은 한적한 주택가다. 식당이 있을 것 같지 않는 길을 조금 걷다가 모퉁이를 돌았더니 홀연 한식당이 나타났다. 여행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이 식당은 점심식사 후에 문을 닫았다가 6시부터 저녁을 낸다고 한다. 

식당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한국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이 두 팀이나 더 들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식사 중에 모두 같이 건배를 하는 등 떠들썩하게 식사를 즐기는 품이 그동안 분위기가 많이 어우러진 듯하다. 이날 주 식단은 돼지갈비찜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숙소로 이동했는데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서 충분히 쉴 수 있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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