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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주년 기념/ 아픈 역사의 현장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목포편]

3.1운동 백주년 기념/ 아픈 역사의 현장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목포편]

곽경근 기자입력 : 2019.02.27 15:57:24 | 수정 : 2019.11.12 14:21:53

 

구 목포일본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목포 평화의 소녀상' 구 목포일본영사관은 목포 역사교훈여행의 출발점이다.

- 군산, 강경, 목포 지역 ‘3.1운동 유적지와 일제 수탈 현장을 찾아서-

- 교인과 학생, 상인들 일 경찰과 맞서 대한독립만세 외쳐-

- 치욕의 현장 보존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

- 적의 재산인 적산가옥’, ‘회수재산혹은 귀속재산으로 명칭 바꿔야-

- 어둡고 아팠던 과거,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 주목-

양동교회 전경

올해는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맞서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쿠키뉴스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당시 일제의 쌀 수탈을 비롯해 경제 수탈이 극심했던 군산과 강경/논산, 목포 지역을 찾았다.

항일 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와 비록 일본식 건축물이긴 하지만 우리 땅에서 캔 흙과 돌, 나무와 선조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지은 적산가옥이라  불리는 근대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적산(敵産)은 뜻 그대로 해석하면 적국의 재산이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가옥들은 해방 후 미군정이 소유로 있다가 우리 정부에 귀속된 후 일반에게 불하했다.

 

목포 구도심의 옛 일본가옥

-굴욕의 공간과 시간도 우리가 곱씹고 보존해야 할 역사-

누구에게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과거는 기억 속에 조차 담아두고 싶지 않는 지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어둡고 아팠던 역사도 꼼꼼히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가 주목 받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커다란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고 체험하면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혹은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로 다듬었다.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 한국의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제주4·3평화공원을 비롯하여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비무장지대(DMZ),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제주도 알뜨르 비행장 등이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왠지 미워보였던 왜식 건물정도로만 취급받던 적산가옥들이 새롭게 역사교훈상품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도 역시 우리 역사이기에 네거티브 헤리티지(부정적 문화유산)’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면서다.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군산, 목포, 강경, 인천, 영주, 구룡포 등 각 지역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대표적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적의 재산이란 뜻인 적산가옥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 후 회수한 재산이니 회수재산이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역사에서 기억과 기념은 다르다. 눈에 안보이면 잊혀진다, 아무리 아픈 상처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보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올해 6월부터는 각 도나 시에서도 근대건축물 등 사라지는 중요한 자산들을 자체적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황 소장은 이를 계기로 가치 있는 문화자산들이 개발 논리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 동본원사

한국과 일본은 겉으로는 우방국이지만 뿌리 깊은 역사 문제로 인해 가깝고도 먼 나라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의 과오를 반성할 생각이 없다. 아직도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군사력 확장에 힘을 쏟는 일본을 바라보며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가족과 지인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쿠키뉴스는 군산, 강경에 이어 목포 지역의 3.1운동사와 우리가 회수한 근대건축물을 소개한다.

 

유달산 내 3.1독립운동탑

목포의 3.1운동사

-기독교인, 학생, 상인이 만세운동 이끌어 -

-신사참배 거부하고 스스로 학교 문 닫아-

-매 해 4·8 독립만세운동 재현하며 그날의 함성 되새겨-

 191948일 조용했던 목포 거리는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목포의 4.8독립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들과 박상렬 등 상인이 주축을 이뤘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했던 1897년에,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이 세웠다당시 동경 유학 중이었던 남궁혁은 19192월 귀향하여 미곡상을 운영하던 친구 박상렬에게 동경의 2.8 독립 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적 상황을 전달하며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권유하고 박상렬은 이에 동의한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남궁혁과 서울 유학생 오도근과 김영주, 박상렬·박상순·박상오 3형제, 그리고 권영례, 오재복, 이금득 등 9인은 박상렬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이들은 쌀가게에서 몰래 태극기와 현수막 등을 제작해 쌀가마니에 숨겨 놓는다. 같은 시각 양동교회 지하실에서도 곽우영 장로를 비롯해 서기견, 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강석봉, 양병진, 박복영 등 교인들은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격문, 독립신문 등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한다.

1920년대 정명여학교 전경

정명여학교 학생들 역시 교내 기숙사와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태극기를 만들었다.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인을 통해 광주에서 전달 받았다. 그들은 거사 하루 전인 7일 밤, 목포 시내 상점과 가정을 돌며 다음 날 만세운동참여를 독려했다. 일본경찰과 헌병은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 드디어 거사일인 191948일 아침, 양동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기독교인들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는 북교초등학교로, 박상렬은 간이상업학교로 각각 뛰어들었고 박상렬은 150여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은 삽시간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목포시 김향원 문화관광해설사가 정명여자중고등학교 독립기념비 앞에서 목포 4.8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민들도 합세해 이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목포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선두에 섰던 서상봉이 일경의 칼에 양팔을 베여 중상을 입고 체포되는 등 80여 명이 검거되었다. 박상렬은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동생 박상술(朴相述)은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후유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상봉 역시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 이후 정명여학교는 1921년 만세운동을 다시 펼쳐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렀고 1937년에는 영흥학교와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복교하였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 역시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명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운동장에서 4.8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과 기독교인, 상인 등이 주도했으며 48일 만세운동 이후 목포의 항일 정신은 일제 강점기 내내 저항과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명여자중고등학교와 목포시는 매 해 4·8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목포의 만세운동 유적지와 일본 근대건축물

-100년 전 그날 찾아 떠나는 역사교훈 여행-

-호남 근대화 1번지, 개발 광풍 벗어나 근대건축물 산재-

-일제 상흔 여기저기, 도시재생뉴딜사업 통해 변신 노력-

-목포 구도심, 20188근대역사문화공간지정-

-정치인 투기 의혹으로 유명세 치르는 중-

일제강점기 시 목포 전경

1876년 부산 개항에 이어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1897년 목포도 개항한다. 목포는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강제 개항된 부산, 인천, 원산과는 달리 1897년 고종의 칙령으로 개항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발적 근대 항이다. 목포가 개항되자 항구는 일본선박들로 가득 찼다. 이어서 일본영사관이 들어섰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도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은 질 좋은 쌀과 김, 소금, 목화를 마음껏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일본인들은 목포항을 중심으로 유달산 아래까지 한국인을 모두 몰아내고 계획도시를 만들어 본국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갑자기 변두리로 쫓겨난 목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그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고달픈 삶을 살았다. 쌀가마니와 소금가마니를 지고 날랐던 항구나 도심의 골목골목에는 우리 민족의 눈물과 설움이 깊이 배여 있다.

드론에서 내려다 본 목포 구도심

유달동과 만호동 등 목포 구도심은 근대 건축유산의 보고다. 대부분의 도시는 재개발로 원형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목포는 개발의 광풍이 비켜가고 매립지인 외곽으로 신도심이 형성되면서 역으로 구도심은 옛 도시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문화재청은 이곳을 역사문화거리에서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지난 20188,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 114038m² 공간을 등록문화재 제718로 지정했다. 이같이 문화재들을 개별적으로 등록해서 관리하던 기존 방식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자원들이 모여 있는 거리마을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식을 (), ()’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라고 일컫는다. 목포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군산, 영주와 함께 첫 시범사업지로 선택됐다.

일제강점기 시 목포 중심가 모습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최근 들어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바로 이곳이 손혜원 의원이 투기 의혹으로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장소이다.

비록 일제강점기 시 우리 민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어진 건축물이긴 하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재정비가 필요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지우고 싶은 일제의 잔재 역시 우리가 보존해서 후대에 반성과 교훈의 장으로 삼아야한다. 일제 침탈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를 우리 스스로 파괴한 후 우리가 식민통치를 한 증거를 대봐라고 우기는 일본인도 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우리의 아픈 역사 현장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목포로 목적지를 정했다면 유달산에 올라 목포 시내를 한번 살펴본 후 유달산 바로 아래 구 일본영사관으로 내려가면 된다.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해 시민과 관광객을 맞고 있다. 박물관 초입의 평화의 소녀상앞에서 묵념 후 회수재산 혹 귀속재산으로 불리는 일본의 근대건축물을 차례로 돌아보자.

 

구 목포일본영사관 전경

구 목포일본영사관(목포근대역사관 제1· 사적 제289)목포 개항 후 일제가 영사 업무를 보기 위해 1900년에 설립한 행정 관청으로,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바뀌었다. 목포 근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오사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과 하늘색 목조가 잘 어우러진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물 곳곳에 남아있는 장식을 보면 벽돌에 새겨진 욱일기, 국화, 벚꽃 등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일본어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을 찾은 관광객들이 3.1운동 당시 의상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목포의 개항과 당시 조선의 역사, 일제의 야욕과 수탈의 상징적 사진들, 당시 동척이 쓰던 금고 등이 있으며 2층까지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구 일본 영사관 뒷편의 방공호 입구

일제가 파놓은 방어 시설, 방공호(등록문화재 제588)

영사관 건물 뒤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파놓은 길이 85m의 동굴이다. 동굴 내부엔 오키나와의 해군 방공호를 그대로 꾸며놓은 모형도 볼 수 있다.

등록문화재(登錄文化財)란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이다.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건설·제작·형성된 건조물·시설물·문학예술작품·생활문화자산·산업·과학·기술분야·동산문화재·역사유적 등이 주 대상이다.

목포근대역사관 제2관의 일제 만행을 알리는 사진 전시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목포근대역사관 제2· 전라남도 기념물 제174)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이다. 1921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을 착취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 국책 회사 건물이다. 후기 르네상스 양식에 장방형 평면의 2층 석조 건물로 일본을 상징하는 무늬가 건물 곳곳에 새겨져 있다. 좌측 상단부엔 벚꽃문양, 내부 1층 벽면엔 태양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동양척식주식회사는 토지 매수가 주 업무로, 당시 17곳의 농장을 관리한 목포 지점은 전국 9개 동척 지점 중에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2개 층으로 이뤄진 역사관엔 목포의 근대사와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현 목포문화원· 등록문화재 제29)

1929년에 건립한 벽돌 표면에 붉은색 타일 마감의 2층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직사각형이며 수직 창이 정면에 4, 측면에 각각 3개씩 2층까지 나 있다. 전면 중앙과 양쪽 측면의 짧은 포치와 수직 창 등이 당시 지방 금융 건축물의 특징을 나타낸다. 목포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근대 금융계 건축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신한은행 소유이며 목포시장이 관리한다.

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유달초등학교· 등록문화제 제30)

일제강점기 시 일본인 자녀를 위해 1898년 개교한 학교이다.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제강점기의 초등학교 건물 강당이다. 학교 교무실 앞 복도엔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포획한 토종 호랑이가 박제되어 있다.

양동교회 전경

양동교회(등록문화재 제114)

전남 최초의 교회로 1898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3년에는 300여 명의 교인들이 힘을 합쳐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교세(敎勢)가 확장되자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을 짓게 되면서 1911년 석조예배당을 완공하였다. 건물 양 측면에 새겨진 대한융희 4이라는 문구와 태극무늬가 눈길을 끈다.


출입문이 2개인 것이 특이한데, 오른쪽 문은 남성 신도가, 왼쪽 문은 여성이 드나들었다. 정문 입구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고, 그 옆으로 박연세 목사의 순교 60주년 추모비가 설치돼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 동본원사 야경

구 동본원사(오거리문화센터· 등록문화재 제340)

1898년 세워진 동본원사는 목포에 들어선 일본 첫 불교사원으로 정식명칭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이다. 해방 이후 정광사의 관리를 받다가 1957년부터 목포중앙교회로 사용하게 되어 사찰이 교회가 되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101, 오거리문화센터로 개관하여 각종 문화행사 및 전시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 나상수 가옥

⑦ 구 나상수 가옥(행복이 가득한집 카페· 등록문화재 제718-5)

'일제 잔재'관광자원으로 재탄생

1930년대 일본인 가옥이 운치 있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나온다. 일명 나상수 가옥이라 불리는 이곳은 인근에 있는 회수가옥 중에서 가장 눈에 띈다.

여러 개의 접시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가공하지 않은 원목 테이블과 라탄 의자를 연출하는 등 리빙 편집 숍이라 해도 믿을 만큼 수준급의 인테리어 솜씨에 감탄이 쏟아진다. 구 목포부립병원 원장 관사나 일본 상인의 가옥으로 추정된다.

이훈동 정원

이훈동 정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5)

호남 최대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다유달산 남동쪽기슭에 1930년대 일본인이 서원 양식의 저택을 짓고 꾸민 정원이다. 해남군 출신 전 국회의원 박기배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1950년대에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이 인수하였다.

향나무, 소나무, 엄나무, 후박나무, 종가시나무, 편백나무, 흑싸리나무 등 130여 종의 다양한 수목이 자라고 있고, 곳곳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식 5, 7층 석탑과 석등도 볼만하다.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모래시계>, <야인시대>의 세트장으로도 유명하다. 매주 토요일 대중에게 개방된다.

 

 

동명동 77계단

⑨ 동명동 77계단(향토유적 제30)

동명동은 예부터 소나무가 많아 송도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소나무를 모두 베어 벚나무를 심었고, 언덕 정상에 송도신사를 세웠다. 신사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엔 77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77계단은 일본인들에게는 신사에 오르는 성스러운 계단이었고, 나라를 뺏기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한국인들에게는 굴욕의 계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이곳 계단 입구에서 기념사진 찍는 것이 의무였다고 회상 한다. 계단은 20073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77계단 기념비가 입구 쪽에 세워져 있다.

구 일본인 교회

⑩ 구 일본인 교회(등록문화재 제718-6)

구 나상수 가옥 맞은 편에 철문이 굳게 닫힌 잿빛 건물이 보인다. 19229월 준공되었고 19276월 한차례 증축된 일본인들이 예배를 드린 기독교회이다. 목포 사회복지시설 '공생원'을 운영한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1912~1968) 여사가 다녔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전면부가 종탑형식의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상부가 없이 1층만 남아있는 상태로 당시 일본교회의 건축형식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구 목포화신 연쇄점

구 목포화신 연쇄점(김영자 아트홀· 등록문화재 제718)

구 화신백화점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화신백화점은 일제강점기 당시 목포 지역에서 동아부인상회와 함께 대표적인 판매시설이다. 일본인들이 주로 왕래하던 백화점 앞 오거리는 서울 명동에 버금갈 만큼 번화가였다. 당시 건물로서는 특이하게 철근콘크리트 라멘조로 건축되었으며 외관도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선구적으로 적용한 근대기 목포 지역의 상가 건물이다.

붉은 벽돌 창고

붉은 벽돌 창고(등록문화재 제718-14)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창고로 추정되며, 당시 목포 부두와 가까운 지역에서 화물을 보관하기 위해 건축물이다. 근대기 목포 부두와 그와 연계된 창고 지역의 흔적, 역사성, 장소성을 보여주는 붉은 벽돌 창고로 건축원형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당시 창고로서는 특이하게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건축되었다.

정명 100주년 기념관 전경

정명 100주년 기념관 (Jungmyung Memorial Hall)

정명여자중고등학교는 1903년 유진벨(Eugene Bell) 목사가 설립한 목포 최초의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다. 1990년까지 교장 사택으로 사용되다 ‘100주년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2층 전시실엔 졸업생들의 흑백사진과 1970~80년대 교복, 8비트 컴퓨터와 측음기, 독립운동 자료 등 학교의 오랜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목포=·사진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드론 촬영=왕고섶 사진가 취재협조=목포시 김향원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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