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2-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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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원형극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도 하는 콜로세움(Colosseum)은 로마의 중심에 있는 타원형 건축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의 명에 따라 서기 72년에 공사를 시작한 콜로세움은 후계자 티투스(Titus) 황제가 서기 80년에 완공시켰고, 뒤를 이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 시절 보완됐다. 플라비안 왕조의 세 황제가 건설과 연관이 있으므로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라고 부른다.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Nero) 황제의 거대한(colossal) 청동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무렵 라틴어로 ‘영국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를 써서 유명해진 영국의 역사가 겸 신학자 비드(Bede) 성인은 널리 인용되던 예언에서 조각상의 상징적 의미를 언급한 바 있다. 

“Quamdiu stat Colisæus, stat et Roma;  quando cadet colisæus, cadet et Roma;  quando cadet Roma, cadet et mundus(거상이 서있는 한 로마도 그렇다. 거상이 떨어지면 로마가 떨어지고 로마가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다).” 청동상은 결국 무너져 재활용되고 말았다. 다만, 로마는 망했지만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장소는 켈리우스(Cælius), 에스퀼리누스(Esquilinus) 그리고 팔라티누스(Palatinus) 언덕 사이의 낮은 계곡 바닥에 있던 평평한 지역으로 운하가 있던 곳이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인구밀도가 높았지만, 서기 64년의 로마 대화재로 황폐화됐고, 지역의 대부분은 네로황제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공사비는 서기 70년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성전에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조달됐고, 공사는 끌려온 10만의 유대인 노예가 투입됐다.

콜로세움은 189×156m의 크기로 면적은 2만4000㎡에 달한다. 외벽의 높이는 48m다. 중앙에 있는 경기장은 높이가 5m인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길이가 87m 너비가 55m인 타원형으로 ‘지하’라는 의미의 히포게움(hypogeum)을 덮고 있다. 

콜로세움은 목재, 석회암, 응회암, 타일, 시멘트 및 모르타르와 같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외벽은 모르타르 없이 100,000㎥ 이상의 석회석이 들어갔다. 이것들을 결속하는데 300톤의 철제 조임쇠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친 지진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북쪽의 외벽만이 남아있다. 지금 남아있는 콜로세움의 외관은 사실 원래는 내부 벽이었다.

외벽의 남아있는 부분은 다락을 올린 3층의 아케이드로 돼있으며, 창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다. 아케이드는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혹은 코린트식의 주두를 가진 기둥으로 구성됐고, 2층과 3층의 아케이드에는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동상으로 장식돼있다. 다락의 꼭대기에는 240개의 돛대가 있어 벨라리움(Velarium)이라고 하는 천막을 걸어 빛과 비를 막았다. 

5만~8만 명이 동시에 입장 가능했으나 평균 6만5000명을 수용했으며, 1층에 있는 80개의 출입문을 통해 입장할 수 있었다. 관람객은 번호가 매겨진 도자기 파편으로 된 입장권을 받아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 경기를 비롯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입된 코뿔소, 하마, 코끼리, 기린, 오로쉬, 사자, 바르바리 사자, 표범, 표범, 곰, 카스피 호랑이, 악어 및 타조 와 같은 야생동물을 사냥하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서시 107년의 다키아(Dacia)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07일 동안 1만1000마리의 동물과 1만명의 검투사가 123일 동안 경연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초기 기독교 시절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로세움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그 가운데 검투경기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경기에 진 자는 죽음을 맞아야 했으니 목숨을 걸고 하는 격렬한 경기는 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를 본 관중의 흥분 또한 높아져 이성을 잃을 지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대 작가들은 콜로세움에서 나마키아(naumachiae, ‘해군 전투’라는 의미의 나발리아 프로엘리아(navalia proelia)라고도 함)를 재현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80년에 열린 티투스 황제의 즉위식에서는 콜로세움에 물을 가득 채우고 훈련된 말과 황소가 헤엄을 치도록 했다고 기록돼있다. 콜로세움에 물을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나, 어떻게 물을 뺐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을 비롯해 ‘데메트리우스와 글래디에이터(Demetrius and the Gladiators)’, ‘용의 길(Way of the Dragon)’, ‘글래디에이터(Gladiator)’ 등 수많은 영화의 무대가 됐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검투사경기의 극적인 장면은 ‘글래디에이터’에서 볼 수 있다.

미국작가 다니엘 P. 매닉스(Daniel P. Mannix)가 1958년에 발표한 소설 ‘죽어야 할 자들(Those About to Die)’를 각색한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감독해 200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서기 180년, 오늘날 스페인의 트루히요 출신 장군 막시무스 데이무스 메디리우스(Maximus Decimus Meridius)가 비엔나 인근 빈도보나(Vindobona)에서 게르만족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부패한 로마를 구하기 위해 자질이 부족한 아들 코모두스(Commodus)가 아닌 막시무스 장군을 후계자로 점찍는다. 비극은 이를 엿들은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며 시작한다. 이후 코모두스는 막시무스 장군과 가족을 몰살하라 명령하고, 가족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막시무스는 검투사가 돼 복수의 칼을 간 끝에 드디어 콜로세움에서 코모두스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게 된다.

콜로세움을 보고 난 다음 일단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바로 산 그레고리오 거리를 돌아선 곳에서 버스가 섰다. 서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다. 고대 로마식 2륜 전차경기를 비롯한 각종 여흥행사를 이르는 루디(Ludi)가 벌어지던 장소다. 

아벤티누스(Aventinus)언덕과 팔라티누스(Palatinus) 언덕 사이의 계곡에 만들어진 길이 621m, 너비 118m에 달하는 경기장에는 25만 명이 넘는 관중이 입장할 수 있었다. 고대 로마와 로마제국을 통틀어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운동장은 처음 본 것 같다. 영화 ‘벤허’에서 본 전차경기장이나 이스라엘의 가에사라에서 본 전차경기장과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전차경기장들은 그저 전차경기장 혹은 소전차경기장이라고 해도 되겠다. 

반나절에서 며칠 동안에 걸쳐 열리기도 하는 루디는 종교의식을 비롯해 다양한 축제를 말한다. 축제 기간 중에는 말과 마차경주, 운동경기, 연극 및 리사이틀, 짐승사냥과 검투사 대결 등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축제와 리사이틀 등이 열리는데, 2001년 AS로마가 세리에A에서 우승했을 때와 2006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우승 당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승리를 축하했다. 한편 2007년에는 영국밴드 제네시스(Genesis)가 이곳에서 50만 청중이 모인 가운데 공연을 벌였다.

이어서 우리는 판테온신전으로 이동했다. 판테온으로 가는 길에 미네르바 광장(Piazza della Minerva)에서 코끼리 오벨리스크를 만났다. 높이 5.47m의 미네르바 오벨리스크(Obelisco della Minerva)는 로마에 있는 12개의 오벨리스크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다. 

1660년대에 이탈리아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교황 알렉산더 7세(Fabio Chigi)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이 오벨리스크는 1499년 12월 베네치아의 알두스 마누티우스에 의해 인쇄된 저자 미상의 책 ‘폴리필리의 꿈(Hypnerotomachia Poliphili)’에서 이미지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폴리필리의 꿈(Hypnerotomachia Poliphili)’에서 사랑하는 여인 폴리아(Polia)를 찾아 나선 남주인공 폴리필리오(Poliphilo)는 거친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숲의 요정의 안내로 사랑하는 이를 찾게 된다. 하지만 간절하게 사랑의 고백을 하던 중 방해를 받아 고백을 반복하게 된다. 

폴리아는 폴리필리오의 사랑을 거부하다 큐피드의 도움으로 죽음 같은 잠에 빠지고, 폴리필리오의 키스로 잠에서 깬다. 이후 비너스의 축복 속에서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 듯했지만, 폴리필리오가 폴리오를 안는 순간 폴리오가 공기 속으로 사라지면서 폴리폴리오는 잠에서 깨어난다는 줄거리다. 장자의 호접몽을 닮았다. 

오벨리스크 뒤에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가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공사 중이었는지 전면을 천막으로 가리고 있었다. 미네르바 광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원통형의 판테온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보다 먼저 판테온건물의 뒤편에 붙어있는 듯한 넵튠대성당(Basilica di Nettuno)을 볼 수 있다.

시칠리아의 밀라쪼(Milazzo)와 나올로쿠스(Naulochus), 그리스 인근의 악티움(Actium) 등지에서 벌인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그리파(Agrippa)가 승전을 기념하고 바다의 신 넵튠에게 감사하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대성당의 건설은 로마의 제4지구의 건설계획에 포함된 것이었다. 

대성당의 구조는 로마제국의 전통적인 성당의 구조보다는 로마의 목욕탕의 구조와 유사하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직사각형의 구조에 짧은 면에 2개의 직사각형 틈새가 있고, 긴 옆면에 2개의 깊은 반원형 원이 있다. 더 작은 반원형 틈새는 산재해 있다. 지붕은 양쪽으로 4개의 코린트양식 주두를 가진 기둥이 3개의 십자가 모양의 금고를 받치고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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