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일어나 등교” 2021 수능 앞둔 ‘늦깎이’들의 고군분투

기사승인 2019-11-27 0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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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바통은 넘겨졌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선배들과 달리 고등학교 2학년 후배들은 2021학년도 수능을 향해 이제 경주를 시작했다. 지난 20일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한 ‘2019 11월 모의고사’가 전국 고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진행되면서 본격적인 서막이 올랐다.

어린 학생들만 떨리는 마음으로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과 ’공부는 사치’라는 인식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던 이들이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다. 바로 배움으로 ‘제 2의 봄’을 만끽하고 있는 만학도들이다. 

“‘턴’(turn)은 ‘돈다’는 뜻이죠. ‘테이크 어 턴’(take a turn)은 무슨 뜻일까요? ‘이번에는 네 차례야’라는 뜻이에요”

만학도들도 ‘손주뻘’인 고2 학생들과 함께 수능 준비에 돌입했다. 26일 찾은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일성여자고등학교 2학년 1반 교실. 3교시 영어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분위기는 진지했다. 선생님의 설명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학생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을 열심히 따라 하다가도 선생님이 칠판에 문법을 적자 교실은 곧바로 고요해졌다. 깊게 주름 패인 손으로 공책에 한자 한자 정성스레 눌러 적었다. 칠판에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자’가 크게 적혔다. 급훈은 ‘내가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프라이’다. 

일성여중고는 서울 내 12곳의 학력 인정 평생교육 시설 중 한 곳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다. 16개월 차 이상 학생들은 3학년, 8개월 차 이상 학생들은 2학년, 그 외 학생들은 1학년이다. 연령대는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2020학년도 수능에는 최고령 응시자인 오규월(78) 할머니를 비롯해 재학생 137명이 응시했다. 

못 배운 한(恨)이 가슴에 맺힌 것일까. 노장들의 학구열은 현역 못지않다. 문정림(68)씨에게 배움은 “나의 전부”다. 문씨는 경기 화성시 동탄에 산다. 오전 5시50분에 일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린 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한 번 버스를 타야 교문 앞에 도착한다. 어려운 시절 초등학교 졸업장도 겨우 받은 문씨. ‘못 배웠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항상 위축됐다. 대화도 잘 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피하던 때가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자신감이 생기고 밝아졌다. 말문도 트였다. 

가고 싶은 학과를 고민하는 심정도 동기들과 다를 바 없다. 손인옥(58)씨 역시 초등학교를 마친 뒤 진학하지 못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때때로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전문용어와 영어 단어 앞에서 손씨는 작아졌다. 우연찮은 기회로 다시 학생이 된 그는 매일 오전 4시30분에 눈을 뜬다. 수원에서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아침 일찍 와 예습과 복습을 하는 손씨는 모범생이다. 손씨는 “대학에 가면 부동산 학과에 진학하고 싶다. 부동산에 관심이 많고 배우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새벽 4시 일어나 등교” 2021 수능 앞둔 ‘늦깎이’들의 고군분투벌써 대학에 간 뒤 하고 싶은 일이 한가득인 수험생도 있다. 송필순(71)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결혼해서도 아이 키우랴, 장사하랴 바빴다. 이웃들이 ‘아무개 엄마는 사막에 던져놔도 우물 파서 장사할 거다’고 말할 만큼 이 악물고 산 세월이었다. 13년간 병간호하던 남편이 지난 2016년 끝내 세상을 등진 뒤 우연히 TV를 보다 배움의 기회를 알게 됐다. 송씨는 “동네 사람들이 ‘남편 보내고 어떻게 살아’ 물으면 ‘나 학교 다녀’ 이렇게 답한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면서 “대학에 가면 사회복지과에서 봉사에 대해 배우고 싶다. 또 방학 기간에 국내와 국외 여행을 많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손씨는 ‘수능이 다가오는데 긴장되지 않나’라는 질문에 “긴장은 하나도 안 된다. 시험 잘 보고 못 보고가 아니라 끝까지 완주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면서 “고2 동기들에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수능 공부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교사들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일성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 나경화(34·여)씨는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 한 번을 못 봤다”면서 “공휴일이나 명절이 껴서 수업을 못 하게 되면 그렇게들 아쉬워하신다. 이런 학교는 아무 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교사는 “예전에는 딸이 영어로 쓰인 간판 앞에서 보자고 하면 영어를 읽을 줄 몰라 길을 헤맸는데 이제는 읽을 줄 안다며 고마워한 학생이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교 공부, 매달 보는 한자 시험 준비에 집안일까지 해내시는 걸 보면 대단하다. 여기 계시는 학생분들은 그야말로 ‘슈퍼우먼’”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인생은 콩나물 시루같다. 처음에는 콩나물 시루에 물을 아무리 부어도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또 어느새 보면 콩나물이 가득 자라있다.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나에게 쌓이고 남는게 있다고 믿고 끝까지 도전하겠다”고 다짐한 손씨. 목소리에는 세월에서 오는 여유가 넘쳤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사진=박효상 기자 tina@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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