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2-25 04: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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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반, 카우나스 성(Kauno pilis)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성으로 이동하는 길에 서 있는 석상은 발트 신화에 나오는 페르쿠나스 신상(神像)이라고 했다. 북유럽의 발트신화에는 하늘과 땅과 땅속을 관장하는 3명의 신이 있다. 

‘페르쿠나스(Perkūnas)’는 번개와 천둥과 폭풍의 신으로 발트신화의 주신(主神)이다. 초목, 용기, 성공, 세계의 정상, 하늘, 비, 천둥, 번개 및 천체를 상징한다. 포트림포(Potrimpo)라고도 하는 ‘파트림파스(Patrimpas)’는 강과 바다, 곡물, 다산, 전쟁의 승리 등과 관련된 행운을 담당하는 신으로 봄과 연관이 있다. 

카울리니스 세니스(Kaulinis senis)라고도 하는 ‘벨니아스(Velnias)’는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두 명의 창조신 가운데 하나이다. 리투아니아 신화에 나오는 세 명의 주요신 가운데 파툴라스(Patulas)와 동일시된다.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 사람들이 숨겨놓은 보물과 식생에 필요한 물을 보호하고, 사람들의 사후세계를 관장한다. 

하지만 카우나스 성으로 가는 길에 만난 석상은 페르쿠나스 신상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조각가 호베르타스 안티니스(Robertas Antinis)가 1963년에 화강암으로 제작한 ‘칸클레스 연주자’다. 칸클레스는 라트비아의 코클레스(kokles), 에스토니아의 칸넬(kannel), 핀란드의 칸텔레(kantele) 그리고 러시아의 구스리(gusli) 등 발트 연안국가들의 타 현악기와 같이 상자형 지터(Box zither)에 속한다. 

핀란드 언어학자 이노 니에미넨(Eino Nieminen)에 따르면 원시 인도-유럽에 어원을 둔 원시 발트어 ‘kantlīs/kantlēs’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미는 ‘노래하는 나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리투아니아 민속학자 로무알다스 아파나비키우스(Romualdas Apanavičius)는 ‘선박’을 의미하는 원시 유럽-인도어 어근 ‘gan(dh)-’에서 유래했다고도 주장한다. 

하여튼 ‘칸클레스’라는 단어가 1580년 루터교 목사 요나스 브레쿠나스(Jonas Bretkūnas)의 성경번역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무렵 리투아니아에 전해진 서유럽의 프살테륨(psaltery)을 교회에서 노래반주로 사용하면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악기는 보리수,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로 만든 사다리꼴의 공명통 위에 현을 평행하게 매어 만든다. 칸클레스 연주는 연주자가 무릎 위에 악기를 놓고 손가락이나 뼈 혹은 깃으로 만든 픽을 가지고 현을 퉁기거나 뜯으며 음을 낸다.

카우나스 성은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먼저 구시가지로 이동했다.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시청광장에서 구경을 시작했다. 북서-남동 축으로 직사각형인 광장의 북서쪽 끝에 있는 건물이 ‘백조의 성’이라고 부르는 옛 시청건물이다. 전면에 53m 높이의 탑을 세운 독특한 모양이다. 

이 건물은 1542년에 짓기 시작해 1562년에 완공된 건물로, 당시에는 단층 건물에 전면의 탑도 없는 단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2층을 지었고, 동쪽으로 8층의 탑을 올렸다. 1층은 상업거래, 법원, 교도경비, 재무, 문서고 등 사무실로, 지하실은 물품보관소로 사용됐다. 탑의 지하공간은 감옥이었다고 한다.

1638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을 했고, 1771~1775년 사이에는 17세기에 철거한 건물 일부의 재건축을 포함해 탑에 바닥을 추가하는 등 시청건물을 바로크 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을 곁들여 재건했다. 1824년에는 정교회가 사용하다가 탄약보관소로도 사용됐다. 이후 1836년에 또 다시 재건돼 러시아 황제를 위한 거처로 쓰였다. 1862년부터 1869년 사이에는 카우나스 타운 클럽, 러시아 클럽, 소방관 사무실 그리고 러시아 극장들이 들어왔다.

1869년부터는 다시 시청으로 사용됐지만, 1944년에는 물품보관소로 쓰였고, 1951년에는 카우나스 기술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73년 1층에 결혼식장과 결혼등록 사무소가 들어왔다. 지하실은 도자기 박물관이 들어섰다. 같은 해 재건작업이 수행됐지만, 건물이 많이 손상돼 2005년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이때 외벽이 상아색으로 칠해졌다.

옛 시청을 비롯해 구시가에서 봐야 할 장소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고 자유시간을 얻었다. 이에 먼저 옛 시청건물에 있다는 박물관을 비롯해 53m 높이의 종탑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입장료는 2.5유로. 65세 이상 시니어 할인을 적용해 0.3유로를 깎아주었는데 여권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거짓말 할 것 같지 않아보였다면 감사할 노릇이나,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봤다면 조금은 섭섭할 노릇이다. 평소에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편인데 말이다.

입장 후 전망대에 올라가보려 했는데, 회의 중이라서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입장했던 일행은 종탑에 올라가봤다는데, 참 운도 없다. 지하에 있는 박물관을 구경했다. 카우나스 인근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수세기 전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종탑 지하에 있는 감옥은 통로 양편에 항쇄와 차꼬를 쓴 채 서있는 죄수, 거꾸로 매달린 죄수의 사타구니를 톱으로 가르는 모습, 화형을 당하는 죄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입구는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감옥 안에는 족쇄였음직한 쇠사슬이 걸려있다.

시청광장 동쪽 귀퉁이에 서있는 동상은 1921년 9월 30일부터 1931년 7월 2일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임시수도일 때 초대 시장을 지낸 조나스 빌레이시스(Jonas Vileišis)다. 1871년 파스발리스(Pasvalys) 인근에 있는 메디니아이(Mediniai)에서 태어난 그는 189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1898년에 졸업하여 변호사가 됐다. 

1904년 러시아제국이 리투아니아어 사용금지가 풀린 뒤에 ‘리투아니아 농부’라는 뜻을 가진 리투아니아어 신문 리에투보 우키닌카(Lietuvos ukkininkas)의 발행허가를 받아냈다. 이 신문은 리투아니아 민주당, 농민연합, 리투아니아 농민인민연합 등의 정치적 견해를 담아냈다. 이듬해 빌레이시스는 이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1918년에는 리투아니아의 내무장관을 1919년에는 재무장관을 지냈다. 

광장의 남서쪽 거리에 있는 교회는 카우나스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교회(Šv. Pranciškaus Ksavero bažnyčia )다. 1642년 알베르타스(Albertas), 코지미에라스(Kazimieras), 페트라스(Petras) 등, 3명의 코잘라비치우스-비주카스(Kojalavičius-Vijūkas)가문의 형제들이 예수교에 헌납한 벽돌집에, 1646년 4개 학년이 있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702년에 대학으로 지명됐지만 실제로는 1761년에 대학이 됐다. 

1660년에는 목조 예배당을 건설했고, 1666년에 벽돌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1732년에 일어난 화재로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대학이 황폐해졌다가 1746~1751년 사이에 재건됐다. 1843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라스 황제의 명에 따라 정교회에 넘겨졌고, 1923년에 다시 예수회로 되돌려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도원과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다. 건물도 일반 및 기술학교에 넘겨졌다. 이후 1990년이 돼서야 교회는 다시 예수교에 돌아갔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왼쪽에 있는 거리를 따라가면 교회 뒤에 오래된 건물이 있다. 페르쿠나(Perkūnas)의 집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페르쿠나의 집은 카우나스의 구시가에 있는 가장 독창적인 세속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원래는 한자동맹이 지어 1440년부터 1532년까지 사무실로 사용했던 것을 16세기에 예수회에 팔았다. 이후 예수회 측에서 1643년 이곳에 예배당을 세웠다. 훗날 폐허가 된 집은 19세기에 재건돼 학교와 극장으로 쓰였다. 

우리에게도 이미 친숙해진 아담 미키에비츠(Adam Mickiewicz)도 이곳에 출연했다. 19세기말 낭만주의 역사가들이 이 장소의 어느 벽에서 발트신화에 나오는 천둥과 하늘의 신, 페르쿠나의 우상을 발견한 뒤로 ‘페르쿠나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담 미키에비츠 박물관이 위치해있다. 

페르쿠나의 집 뒤편에 있는 현대식 건물은 예수교단이 운영하는 카우나스 제주이트 김나지움이다. 페르쿠나의 집에서 카우나스 제주이트 김나지움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있는 정원에 서있는 기둥을 발견했다. 생긴 것으로 보아서는 신화적 의미가 있는 토템 기둥이 아닐까 싶은데, 속 시원하게 설명이 된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다. 

페르쿠나의 집에서 도로를 따라 더 내려가면 네무나스 강변에 서있는 아담한 교회를 볼 수 있다. 비타우타스 대왕 교회(Vytauto Didžiojo bažnyčia) 또는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 가정 교회(Švč. Mergelės Marijos ėmimo į dangų bažnyčia)라고 부르는 로마 가톨릭 교회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며 리투아니아에서 중요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기도 하다. 

1399년 8월 12일 에디구 쿠틀로와 테무르 쿠틀로가 지휘하는 타타르 군과 리투아니아의 대공 비타우타스와 토크타미시의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비타우타스 대공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성모 마리아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교회를 이곳에 짓도록 명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1400년 완공된 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교회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목조 혹은 벽돌로 지어졌던 것인데, 곧 새로운 벽돌교회로 대체됐다. 탑은 15세기에 건설했다. 1603, 1624, 1668년에 발생한 카우나스 시의 대화재에서도 교회는 도시의 변두리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655년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황폐화됐고, 곧 복원돼 1669년에는 3층으로 된 벽돌 수도원으로 변모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1812년에는 프랑스군이 점령해 무기창고를 세웠고, 퇴각하면서 교회에 방화를 해서 내부가 불에 타기도 했다. 1819년 프란체스코 관구장 그리갈리아우스 고리키오(Grigaliaus Golickio)가 주도해 재건됐지만, 1845년 러시아제국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에는 독일군이 점령했을 때 교회 지붕이 무너져 창고로 사용됐다. 

네무나스 강변에 있는 교회는 인간이 저지른 재앙 외에도 봄 홍수 때문에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교회 문 가까이 서있는 종탑의 북쪽 벽의 수위표에 ‘1946년 11월 24일 2.90m까지 물이 차올랐다’라고 적힌 것이 가장 심각한 피해의 기록이다. 1919년 4월 18일 비타우타스 대왕 교회는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왔다. 1931~1938년 그리고 1979~1989년 사이에 교회의 복원작업이 수행됐다. 이에 교회의 내부는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심지어는 19세기 양식까지도 섞여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여덟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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