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표선에서 남원 해변 오십리 해변길

기사승인 2020-02-01 00:00:00
- + 인쇄
그날 의욕적으로 꽤 긴 거리를 걷고 집에 들어오니 예상대로 발가락과 발바닥에 물집이 제법 실하게 생겼다. 또 며칠은 걷기를 포기하고 집에서 쉬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함덕 해변의 낯익은 식당이 간접 소개가 되고 있었다. 지나다니면서 그냥 중국음식점으로만 생각했는데 스촨 요리 전문점이라 한다. 마라탕, 마라상궈, 삐양삐양면 등 음식 이름이 다 낯설었는데 사람들이 참 맛있게 먹는다.

일단 방송에 소개가 되었으니 사람들 우르르 몰려들어 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 되면 잠잠해질 때까지 가지 않을 생각으로 이튿날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갔다. 서울에서 이사 온 돈가스 집처럼 요란스럽고 부산스럽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꽤 많았다. 다행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안내 직원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어색하지 않게 마라탕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식당 안주인인 듯한데 테이블 안내를 하며 덧붙인다. 늘 여유 있게 손님을 맞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아왔는데 엊그제의 방송 이후 거의 북새통을 이루고 있단다. 만석인 식탁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편하고 여유 있게 식사를 하지 못할까 걱정이라고 한다.

나나 아내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처음 접한 음식인데도 만족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데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어 오늘 영업을 끝낸다는 안내가 걸렸다. 며칠 후 조금 늦은 시간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갔더니 그 안주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분들에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재료를 더 많이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함덕 해변의 ‘스촨빠슈마라탕’은 가볼 만한 식당이다. 음식의 질은 말할 것도 없고,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을 대하는 주인 내외의 마음 씀씀이가 곱다.

매일 아침 병실에 가면 어머닌 말끔히 단장한 얼굴로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 간병인을 채근해 얼굴 씻고 로션 바르고 미리 빗은 모습으로 얼굴에 웃음을 담뿍 머금고 나를 맞았다. 식사는 늘 내가 다시 사무실로 간 다음에 했다. 오른쪽 마비가 왔으니 식사 중에 음식물이 흘러나오곤 하는데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오른쪽 마비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매일 재활치료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있는 듯하지는 않았다. 왼쪽 손을 조금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은 전적으로 간병인의 몫이었다. 간병인이든 간호사든 또는 재활치료사든 병원의 최고 경영자 옆에서 근무하는 비서실장의 어머니에게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 뇌졸중 후유증으로 인해 팔과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 애써 걷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렵게 움직이더라도 저만큼만 회복되기를, 아니 걷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기 만을 바라며 6개월을 버텼다. 그리고 더는 어머니의 병실 생활이 어려워졌다. 돈 때문이었다. 생활에 여유가 있던 처지도 아니었고, 봉급으로 한 달을 살아내던 시절, 매주 말 지급한 간병인 비용과 치료비, 병실생활에 필요한 기타 비용은 그대로 빚으로 쌓였다. 빚이 빚을 낳기 시작했다.

오름과 숲길을 걸으며 제주가 눈에 익고 걷기가 즐거워지면서 올레를 걷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가서 잘 알려진 관광지의 멋진 자연경관을 보며 감탄하고 유명한 식당에 가서 먹고, ‘뷰가 좋다’는 카페를 찾아가 사진 한 장 남기는 효율적인 제주관광으로는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만감을 걸으며 맛본다.

표선에서 남원에 이르는 올레 4코스는 거리가 19킬로미터이며, 중간에 잠시 해안에서 멀지 않은 중산간 마을을 다녀오기는 하지만, 주로 해안을 걷는다. 제주도 동남쪽의 이 구간은 어찌 보면 내 놓을 것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시골의 해안이다. 제주도의 북쪽엔 제주시 좌우로 애월과 함덕에 가 볼만한 곳이 제법 많고, 동쪽엔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중심으로 해변 풍경이 잘 알려져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남서쪽의 서귀포는 중문을 중심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표선에서 남원까지의 길은 제주 남쪽해안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고 잘 간직되어 있었다. 표선의 ‘제주민속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제주민속박물관은 제주의 전통 가옥과 생활도구, 풍습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야외 전시장이다. 성읍민속마을보다는 조금 더 박제화 되어 있고 상업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보다는 봄과 가을에 방문하기 적합한 곳으로 생각된다. 표선해변의 야영장엔 한겨울인데도 야영텐트가 더러 눈에 들어온다. 

표선을 벗어나면서 이내 길은 바닷가로 나가는데 표선 해변의 흰모래와는 대조적으로 검고 거친 바위들과 암반길이다. 얼마나 오래 자랐는지 암반을 기며 뻗은 순비기나무 줄기가 끝없다. 파도는 거칠 것 없이 밀려와 부서졌다. 그 파도를 넘어 해녀들은 물질을 해야 했고 바다의 신에게 안전을 빌었다.

해안길이라 해서 줄곧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과 부서지는 파도만 옆에 두고 걷지는 않는다. 해안에 심어둔 방풍림 속의 오솔길의 아늑함, 호젓함은 중산간의 깊은 숲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바다를 배경으로 운영 중인 영리 또는 비영리 숙소 앞에선 걷는 이들을 위해 돌에 새겨 놓은 짧은 시를 만나 한숨 돌리며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느낀다. 

잠깐이지만 길은 가까운 중산간 마을의 초대를 받았다. 토산리 마을회관 앞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으려는데 마침 지나가던 주민이 올레스탬프 위치를 알려주며 말을 건넨다. 평소엔 말라 있는 시냇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감귤 농장이 빼곡했다. 여전히 여기 저기 버려진 귤 무더기가 눈에 띤다.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을 소개 안내판도 세워져 있고, 담장엔 한 번쯤 눈길을 줄만한 벽화도 보인다. 

그렇게 신흥리 마을을 빠져나와 다시 해안을 걷는다. 신흥리포구에서 덕돌포구와 태흥2리포구를 지나 남원의 비안포구까지의 해안의 육지에는 양식장이 눈에 띠게 많다. 양식장에서 바다로 흘러나가는 물길 주변엔 새들이 모여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남원이 가까워지며 보이는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의 모습은 한겨울 올레를 걸으며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눈 호강이다. 표선에서 남원까지의 해안은 걷는 이에게만 그 잔잔한 아름다움을 내어준다. 태흥2리포구의 어촌관리공동체 음식점인 ‘옥돔마을’에서 받는 푸짐한 점심상은 덤이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