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로 장식된 이해찬의 정치사

‘선거의 제왕’, ‘기획통’ 등 화려한 발자취

기사승인 2020-04-17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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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조현지 인턴 기자 =당 대표, 국무총리, 교육부장관, 7선의원 등 화려한 길을 걸어온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는 8월 당 대표 임기를 마치고 정계를 은퇴한다. 

21대 총선을 승리로 이끈 그는 이번 결과를 “백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라는 점을 의식해 크게 기뻐하진 않았다. 오히려 몸을 낮추며 “더 겸손한 자세로 민심을 살피겠다”고 밝혔다.

그는 “여권물갈이에 모범을 보이겠다”며 8선 고지를 목전에 뒀지만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신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압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마지막 소임을 다한 이 대표는 여권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로운 퇴장을 할 수 있게 됐다.

◆ ‘선거의 제왕’, 출마한 모든 지역구에서 당선된 7선 의원= 이 대표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선거에 평화민주당 신인으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다.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로 나선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 본격적인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관악을에서 14·15·16·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5선 의원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 대표는 당시 집권여당 의원들과 날선 공방을 벌이는 공격수로 활약하며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대 총선에는 당의 요청을 받아 연고도 없는 세종시에 출마해 당 내 최다선인 6선에 성공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 때 행정수도 이전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에 힘입어 개인 통산 역대 최고인 47.8%의 득표율을 보이며 당선됐다.

20대 총선에서는 13대 때 경쟁 상대였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공천배제를 통보받아 정치생활을 끝낼 위기에도 놓였다. 하지만 이에 불복해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했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당선됐다. 민주당으로 금의환향 한 것이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 스스로 불출마를 결정했던 18대, 21대를 제외하고 모든 총선에서 승리했다. 7선 의원의 기록이 그의 은퇴 선언으로 마무리지어졌지만 ‘최다선(비례후보 제외)’, ‘무패신화’라는 화려한 발자취는 정치권에 오래 회자될 전망이다.   

승리로 장식된 이해찬의 정치사

◆자타가 공인하는 선거 전문가이자 최고의 ‘기획통’= 이렇게 이어온 30여년의 정치생활에서 이 대표는 당 내 최고의 기획통으로 불렸다. 대표적으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7년 대선 당시에는 김대중(DJ) 캠프의 기획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다. 앞선 초대 서울민선시장 선거 때엔 조순캠프 선거 대책 본부장으로 조순 서울시장을 당선시킨 후 정무부시장으로 6개월간 일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해 활발한 교육 개혁정책을 펼쳤다.

2002년 대선에서도 활약했다. 당시 이 대표는 노무현 캠프에서 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와 선거전략 등을 담당해 노무현 참여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4년 참여정부 시절에는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며 ‘책임총리로 지칭될 만큼 실수 없는 국정운영능력도 인정받았다.

이밖에 이 대표는 현역의원 시절 당의 정책위의장만 3번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량을 뽐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표의 이같은 경험과 능력, 굵직한 정치행보가 이번 총선에서도 발휘돼 민주당의 압승을 만들어냈다고 풀이된다. 하지만 이 대표의 화려한 정치행보도 이제 내리막을 걷는 모습이다.

본인 스스로도 건강 상의 이유로 더 이상의 정치활동은 자제하겠다는 입장을 종종 내놨다. 지난 1월에는 정계 은퇴 이후 남북관계에 관한 일을 하고싶다는 뜻도 밝혔다. 덧붙여 “희망사항으로는 평양 대표부 대표로 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승승장구해온 이 대표의 발자취처럼 남북관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길 날을 기다려본다.

hyeonzi@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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