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더 라스트 댄스’를 만든다면?

‘포스트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더 라스트 댄스’를 만든다면

기사승인 2020-07-02 06:00:00
- + 인쇄

[쿠키뉴스] 김찬홍 기자 =지난달 11일 ESPN이 공개한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는 ‘농구 황제’라 불린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루며 큰 화제를 모았다. 회당 평균 시청자 수는 560만 명. 한국에서는 미국보다 약 한 달 늦게 넷플릭스를 통해 영상이 공개됐는데, 콘텐츠 시청 순위 4위를 기록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더 라스트 댄스’가 인기를 끌자 팬들 사이에서는 가장 조던에 가까우면서도, 그 자체로도 훌륭했던 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1월 헬기 사고로 사망한 코비 브라이언트는 선수 시절 ‘포스트 조던’이라고 불렸다. 마이클 조던의 현역 말년에 프로에 데뷔한 코비는 풋내기 시절부터 외모, 포지션, 플레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조던과 가장 닮은 선수로 자주 거론됐다. 수많은 유망주들이 조던과의 비교 과정에서 무너졌지만 코비는 견뎌냈다. 시기와 질투, 조롱과 야유를 극복하고 결국 NBA를 상징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밝혀진 일화들만을 토대로, 쿠키뉴스가 코비 버전의 ‘더 라스트 댄스’를 기획해봤다.


EP.1 농구 황제도 인정한 ‘맘바 멘탈리티’

'농구 황제' 조던의 경쟁심과 승부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조던은 또 지독한 노력파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만 해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런 조던도 코비 앞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조던은 과거 “현역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수와 일대일 맞대결을 펼치고 싶냐”는 질문에 “전성기 시절의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그리고 카멜로 앤써니까지 정말로 많은 선수들이 있는데 내가 현역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조던은 “하지만 이중에서 코비라면 나를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스킬들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라고 코비를 높이 평가했다.

조던은 코비의 열정은 정말로 못 말린다면서 그와 얽힌 일화 하나를 공개하기도 했다.

조던은 “처음에는 너무 자주 연락이 와 짜증이 났다. 어느 날은 새벽 2~3시가 넘어서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그는 틈만 나면 내게 연락을 해서 농구 기술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관해 물어보곤 했다”며 “이런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훗날 그가 NBA 역사상 최고 선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코비의 열정이 있다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코비를 지도한 잭슨 감독 역시 “조던의 모든 것을 롤 모델로 삼았던 선수가 코비였다. 그런데 훈련을 대하는 태도와 독기만큼은 오히려 코비가 조던보다 더 대단했다”며 코비의 열정을 높게 샀다.

죽는 것보다 지는 걸 싫어했던 코비는 현역 시절 연습벌레로 유명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1시간30분 조깅을 한 뒤 5시30분부터 1500개의 슛을 성공할 때까지 연습했다. 이후 팀 훈련을 시작했고 끝나면 본격적으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팬들은 코비가 공중에서 상대를 속이는 모습이 마치 뱀이 몸을 뒤트는 것과 같다며 그에게 ‘블랙 맘바’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코비의 지독한 승부욕과 강인한 정신력을 일컫는 말이었던 ‘맘바 멘탈리티(Mamba Mentality)’는 이젠 지독한 승부욕과 열정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로 통하고 있다. 

EP.2 최고의 파트너이자 앙숙이었던 샤킬 오닐

코비와 조던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데뷔 초 커리어다. 조던은 신인 시절부터 팀의 중심 선수로 성장한 반면, 코비는 2년 동안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대학교 재학 당시부터 전국구 스타였던 조던은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시카고에 입단했다. 어렵지 않게 팀의 중심 선수로 성장했고 신인상도 수상했다. 

반면 코비는 달랐다. 1996년 데뷔 당시 코비는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고졸 가드 유망주에 불과했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이후 트레이드를 통해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팀 내 입지도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2년차까지는 주로 벤치를 지키는 식스맨에 불과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시카고 불스를 개편시킨 조던과 달리 레이커스는 당시 리그 최고의 센터인 샤킬 오닐의 팀이었다. 1986년 트레이드를 통해 레이커스에 합류한 오닐은 팀에 합류하자마자 중심 선수로 자리했다. 코비는 팀내 1옵션인 오닐을 그저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코비는 3년차인 1998~1999시즌부터 급성장 했다. 당시 코비는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며 레이커스의 공격에 중요한 옵션이 됐다. 자연스레 코비와 오닐은 리그 최고의 듀오가 됐다. 2000년 파이널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코비는 오닐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이때부터였을까. 코비와 오닐의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코비는 팀 내 1옵션을 원했고 이 과정에서 오닐과 마찰을 빚었다. 연습 벌레였던 코비는 오닐이 좀 더 농구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며 도발했다.

오닐도 이에 지지 않았다. 코비에게 온갖 별명을 붙여 조롱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친화적이었던 오닐은 언론의 도움을 받아 코비를 공개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오닐의 편이었던 팀 동료들도 코비에게서 등을 돌렸다. ‘농구 황제’ 조던의 위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여론의 반감도 코비를 힘들게했다. 코비는 끝내 2인자 타이틀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코비와 오닐은 2차례나 더 우승을 합작했다. 개개인의 기량에만 의존해 만들어낸 3연속 우승이었다. 이 기록은 조던 이후 최초의 3연속 우승이자 마지막 3연속 우승이다.

두 선수는 2004년에야 갈라졌다. 레이커스는 2004년 파이널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오닐은 팀에 공식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했다.

앙숙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닐이 은퇴한 이후 많이 바뀌었다. 오닐이 은퇴 후 방송 출연에서 코비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두 선수의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후 오닐은 코비의 은퇴 경기와 영구 결번식에 참가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코비의 사망 당시 가장 슬퍼했던 선수도 오닐이었다. 그는 코비의 추모식에서 선수 시절에 대해 “우리는 모두 경쟁심이 강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목표를 이루고 싶어했다”며 “종종 서로에게 불편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믿음은 변함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오닐은 “코비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때 그에게 장난을 걸 수가 없게 됐다. 코비는 분명 ‘나는 우승반지가 5개인데 너는 4개밖에 없잖아?’라며 나를 놀렸을 텐데 그럴 수도 없게 됐다. ‘우리가 계속 함께 뛰었다면 우승반지가 10개는 됐을텐데’라는 농담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됐다. 그렇게 함께 보냈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됐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EP.3 조던과 코비, 그들을 지도한 필 잭슨

조던과 코비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을 가르친 지도자 필 잭슨이다. 두 선수 모두 많은 감독 밑에서 뛰었지만 잭슨과 함께 커리어의 최고점을 찍었다. 조던은 6차례의 우승을 모두 잭슨 감독과 합작했다. 마찬가지로 코비 역시 본인의 모든 커리어를 잭슨 감독과 만들었다.

레이커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할 당시 잭슨 감독은 이미 시카고에서 6개의 우승 반지를 차지한 최고의 명장이었다. 코비는 잭슨 감독 아래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잭슨 감독의 특유의 전술인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조던과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센터인 오닐이 함께하면서 레이커스는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해 2000년대 초반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닐과 잭슨 감독이 떠나면서 레이커스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코비는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에 비해 한 팀을 아우르는 리더십이나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닐과의 불화 이외에도 많은 팀원들이 코비의 지나친 슛 난사와 자기중심적인 플레이를 힘들어했다. 한 때 잭슨 감독도 공격권을 두고 자존심을 부리는 코비를 ‘가르칠 수 없는 선수’라며 혹평했다. 

팀의 리더로 낙점된 코비는 폭발적인 득점쇼로 NBA 팬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러나 팀 사정은 달랐다. 눈부신 개인 성적과 반대로 팀 성적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레이커스는 해를 거듭할수록 우승권과 점점 멀어졌다. 코비 없는 레이커스는 우승할 수 있어도 오닐 없는 레이커스는 결코 우승하지 못할 거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커스는 2005~2006시즌 잭슨 감독을 사령탑으로 복귀시켰다. 

레이커스 지휘봉을 다시 잡은 잭슨 감독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코비에게 전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전에 코비와 묘한 갈등이 있었지만 코비를 인정하며 타협했다. 코비 역시 한층 성숙해진 태도를 보이며 잭슨 감독에게 존중을 표했다. 직전 시즌 34승에 그쳤던 레이커스는 잭슨 감독이 복귀하자마자 45승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권 팀으로 부활했다. 

잭슨 감독은 2011년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2005년에 레이커스에 다시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나는 나와 코비 사이의 모든 것을 해결하려 노력했다”며 “난 코비가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따르는 범위 안에서 그에게도 최대한 많은 자유를 주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2번의 우승을 더 해냈다. 나는 코비가 굉장히 위대하고 현명하며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를 평가했다.

잭슨 감독은 항상 받는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코비와 조던의 차이점이다.

잭슨 감독은 2013년에 출판한 ‘11개의 반지’에서 “조던이 더 카리스마가 있고 사교적이었다. 그는 팀 동료 선수들이나 경호원들과 곧잘 어울렸고 카드 게임을 하거나 시가를 피우며 농담도 잘 했다”고 회상했다. 코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팀에서 어린 편이었다 보니 내성적이었고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진출해서인지 사회성도 부족했다. 하지만 코비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졌고 특히 팀이 원정 경기를 떠났을 때는 팀 분위기를 더 활기차게 만들고자 노력을 했다”고 덧붙였다. 


EP.4 조던에게 피펜이 있었다면, 코비에겐 가솔이 있었다

조던과 스카티 피펜은 불스 왕조를 이끈 최고의 파트너였다. 조던이 공격을 이끈다면 피펜은 수비를 이끈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 두 선수는 불스의 6차례 우승을 합작했다.

조던은 1998 파이널 우승 직후 “피펜이 없었다면 우승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며 “이번 MVP는 내가 아닌 피펜이 받았어야 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조던은 피펜을 수차례 높게 평가했다.

그렇다면 코비의 영원한 단짝은 누구일까. 세 차례의 우승을 함께한 오닐이 최고의 파트너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두 선수는 코트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당시 두 선수는 경쟁자에 가까웠다. 많은 팬들은 코비와 2차례 우승을 함께한 파우 가솔을 최고의 파트너로 손꼽는다.

잭슨 감독이 복귀했지만 코비는 좀처럼 우승 반지를 거머쥐지 못했다. 오닐이 떠난 후 몇 년간 그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코비는 2007년 제리 웨스트 단장에게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선수를 갖춰주지 않는다면 팀을 떠나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코비를 놓칠 수 없었던 레이커스는 2008년 2월 트레이드 마감시간을 앞두고 파우 가솔을 영입하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가솔과 2010년 2라운드 지명권을 얻기 위해 콰미 브라운, 자바리스 크리텐튼, 애런 맥키와 마크 가솔의 지명권에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두 장까지 내줬다. 이전까지 각자의 팀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던 두 선수는 레이커스에서 같이 뛰기 시작하면서 레이커스를 완전히 다른 팀으로 바꿔놓았다.

영리하고 이타적인 파우 가솔을 만난 코비는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가솔과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팀 공격을 이끌었다. 두 선수는 공격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가솔이 합류하면서 코비의 부담도 크게 덜어졌다. 코비의 개인 평균 기록은 소폭 하락했지만 효율성은 올랐다.

가솔 최고의 장면을 뽑자면 단연 09-10시즌 서부 플레이오프 1라운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의 6차전이다. 당시 오클라호마시티는 현재 NBA를 이끌고 있는 케빈 듀란트, 러셀 웨스트브룩, 제임스 하든 등이 버티고 있던 신예팀이었다.

1위와 8위의 대결이었음에도 불구 두 팀은 6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만들었다. 6차전 종료 15초전까지만 해도 레이커스는 93대 94로 지고 있었다.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던 코비는 당시 오른쪽 베이스 라인을 뚫고 점프슛을 시도했는데, 공이 림을 맞고 나왔다. 골밑에서 몸싸움을 하던 가솔은 튕겨 나온 공을 그대로 잡고 다시 팁인슛을 시도해 성공했고, 가솔의 득점은 위닝샷이 되어 레이커스의 2라운드 진출의 발판이 됐다.

코비와 가솔은 경기 외적으로도 잘 어울리던 선수였다. 가솔은 코비에 대해 항상 높게 평가했다. 2014년 시카고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가솔은 “브라이언트는 내게 형제와 같다. 그가 잘되길 소망한다”면서 “나는 브라이언트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지지할 것이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EP.5 코비와 레이커스의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

조던과 마찬가지로 코비에겐 많은 라이벌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당시 올랜도에서 뛰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그의 라이벌 중 한 명이었다. ‘서코비 동티맥’이라 불릴 정도로 경쟁 구도가 치열했다. 또 레이커스와 2000년대 서부 컨퍼런스를 양분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 멤버들도 코비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이 중 레이커커스와 NBA 역사를 양분하는 보스턴 셀틱스는 코비의 커리어 중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로 손꼽힌다. 두 팀은 역사적으로도 인연이 깊다. NBA 최다 우승팀인 보스턴(16회)은 레이커스(15회)와 NBA 초창기부터 리그를 양분했다. 80년대에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보스턴은 래리 버드를 필두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가솔과 손 잡은 코비는 2008년 파이널에서 보스턴과 만난다. 당시 심각한 손가락 부상에도 불구하고 코비는 정규 시즌 82경기를 소화했고,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1위에 등극한다. 코비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규리그 MVP도 수상했다.

하지만 우승을 위해 ‘빅3’를 구성했던 보스턴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6차전 끝에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우승컵을 보스턴에게 내줬다. 보스턴은 코비를 집중 견제했다. 코비는 4차전에서는 자신의 포스트 시즌 최소 득점인 17득점에 그쳤다. 특히 6차전에서는 22득점을 기록했으나 야투율이 저조해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매체들은 오닐이 없는 코비는 우승을 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

코비도 2008년의 패배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2010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코비는 “내 생애 최악의 패배가 언제였냐고? 2008년 셀틱스에게 졌을 때다. 셀틱스에게는 정말 무조건 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 너무나도 화가 났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포스트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더 라스트 댄스’를 만든다면?

2년 뒤 레이커스와 보스턴은 다시 한 번 파이널 무대에서 만난다. 레이커스는 앞선 2009년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을 4대 1로 꺾고 7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오닐과 함께 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코비가 처음으로 거머쥔 우승이었다.

하지만 보스턴과의 파이널 당시 코비는 잔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2009년 12월에 미네소타와 경기에서 오른쪽 검지를 다친 뒤 시즌 중반에는 무릎과 발목에도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코비는 우승을 위해 부상을 감수하고 뛰고 또 뛰었다. 결국 그는 그 해 파이널 7경기에 출전해 평균 41.2분을 소화하면서 28.6득점 8리바운드 3.9어시스트를 기록, 2년 연속 파이널 MVP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닥 리버스 보스턴 감독은 코비를 막으려 폴 피어스와 레이 알렌을 번갈아 코비의 수비수로 붙이며 득점력 봉쇄를 꾀했다. 하지만 코비는 특유의 클러치 능력을 발휘해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특히 7차전에서 코비는 자신이 강심장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4쿼터에만 9개의 자유투를 얻어내 8개를 성공시키는 등 승부처에서 10득점을 올려, 보스턴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5번째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코비는 시리즈가 끝난 뒤 “5번의 우승 중 지금이 제일 만족스럽다. 우승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우승만큼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코비의 커리어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kch0949@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