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역추적 끝에 나오는 ‘빨간비디오’

한성주 / 기사승인 : 2020-07-06 09: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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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연대기]② 30년 전부터 되풀이된 디지털 성범죄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빠르게 진화하고 악화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범죄를 차단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주고 싶어요. 이 작업에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선례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국적 다큐멘터리 제작팀 게이즈 닥스(Gaze Docs)는 디지털 성범죄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다. 팀은 기획을 맡은 이바(Ieva·라트비아)·올리비아(Olivia·영국)·아니사(Anissa·미국), 촬영을 맡은 리론(Liron·그리스), 통역과 편집을 맡은 태이(가명·한국) 등 5명으로 구성됐다.

이바, 올리비아, 리론 등 세명의 팀원은 촬영을 위해 지난해 12월 한국에 입국해 태이를 만났다. 이후 6개월간 이들은 변종을 거듭해 ‘n번방’이 된 디지털 성범죄를 역추적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n번방 규탄 집회를 촬영 중인 게이즈 닥스 팀원들/사진=한성주 기자 

빙산의 일각 ‘몰카’

게이즈 닥스의 다큐멘터리 기획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 광주에서 지내고 있던 아니사는 지인이 불법촬영 범죄 ‘몰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서울 혜화역에서 몰카 범죄를 규탄하고, 가해자에 대한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여성들의 집회도 목격했다. 아니사는 범죄와 그에 맞서는 여성들의 모습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올리비아에게 몰카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 계획을 공유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지내고 있던 올리비아는 기사를 통해 한국의 몰카 범죄를 처음 접했다. 그는 기사들을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몰카를 범죄가 아닌, 드물고 기이한 일처럼 서술하는 기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피해 사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몰카 범죄가 중요한 의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리론과 이바와 함께 한국 취재에 나섰다.

한국에 입국한 팀원들은 뜻밖의 상황을 마주했다. 입국 전 자료조사에서 파악했던 n번방 사건의 파문이 생각보다 강력했다. 팀원들은 몰카에서 시야를 확장해야 했다. n번방의 복잡한 범죄 수법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몰카보다 조직적인 ‘n번방’

지난 4월29일 게이즈 닥스는 서울중앙지법을 누볐다. n번방 운영자 중 최초로 검거된 조주빈의 공판준비기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n번방은 성착취 영상물이 제작·유포된 여러 개의 텔레그램 채팅방이다. 이날 법원에는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과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등 디지털 성범죄의 근절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모였다. 팀원들은 통역을 돕는 한국인 팀원 태이(가명)과 함께 피켓을 든 시민들의 의견을 직접 들으며 사건에 접근했다.

팀원들이 알게 된 n번방의 운영방식은 놀라웠다. 단순히 남의 몸을 몰래 촬영해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는 ‘몰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n번방 운영자들은 아르바이트 모집자나 경찰로 가장해 피해 여성들에게 접근, 개인정보를 빼냈다. 이를 빌미로 피해자가 가학적 영상물을 촬영해 넘기도록 협박했다. 영상물은 수위에 따라 여러 개의 텔레그램 채팅방에 유포됐다. 운영자들은 공유되는 영상물의 수위에 따라 채팅방의 입장료를 다르게 책정했고, sns를 통해 공범을 모집했다. 일부 운영자들은 채팅방에서 성폭력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바는 “n번방만큼 집단적 성범죄는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며 “운영자와 입장자가 돈을 주고받으면서 디지털 성범죄에 기반한 하나의 업계를 형성했다는 점이 충격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리론은 “카메라에 장면을 담아내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았는데, 이 범죄가 얼마나 규모가 큰지 실감했다”며 “피해자에게 벌어진 일들, 피해자와 연대하고 가해자들을 규탄하는 여성시민단체들의 모습을 보며 사안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예나 DSO 전 대표에게서 소라넷 폐쇄 과정을 듣는 게이즈 닥스 팀원들/사진=한성주 기자

n번방보다 오래된 ‘소라넷’
팀원들은 n번방 이전에 ‘소라넷’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DSO(Digital Sex crime Out)의 하예나 전 대표를 인터뷰하면서다. 소라넷은 지난 1999년 개설된 국내 최대 음란물 공유 사이트다. 소라넷 운영자들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사이트를 운영해 국내 법망을 피했다. 소라넷에서는 몰카 영상물은 물론, 피해자를 협박·폭행해 찍은 불법촬영물이 유료로 공유됐다. 이용자는 익명의 불특정 다수였다. 소라넷 접속을 위한 IP주소를 공지하는 트위터 계정은 팔로우 인원이 10만명도 넘었다. 

DSO(Digital Sex crime Out)는 지난 2015년 출범한 디지털 성폭력 대응 조직이다. 모든 구성원은 익명으로 활동했으며, 소라넷에서 자행된 범죄들을 고발해 사이트를 폐쇄시켰다. 팀원들은 하 전 대표와 인터뷰를 거듭하며 n번방은 전례 없는 신종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올리비아는 “인터넷 사이트에 기반한 소라넷이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인 텔레그램을 만나 n번방으로 돌아온 것”이라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문제가 재발한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라넷보다 끈질긴 ‘웹하드’

팀원들은 DSO의 피해자 지원 활동과 유사한 활동을 취재하기에 나섰다. 팀원들은 개인정보 유출·해킹 피해자를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 인터넷피해구제협회 활동가를 만났다. 이 활동가에게서 ‘웹하드 카르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웹하드 카르텔은 웹하드 사업자와 디지털 장의사 사이의 유착관계를 의미한다. 웹하드는 인터넷상에 영상이나 문서를 저장하고, 어디서나 다운로드·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다.
디지털 장의사는 의뢰인이 삭제를 요청한 인터넷 게시물이나 계정을 삭제해주는 서비스다. 웹하드 사업자는 불법영상물 유포를 방조하고, 특정 디지털 장의사를 통해 들어온 삭제 요청만 수용하는 구조로 카르텔이 형성된다.

팀원들은 범죄의 연속성을 절감했다. 소라넷은 폐쇄됐지만, 플랫폼만 옮겨 n번방으로 재발했다. 웹하드 카르텔은 현재도 건재하다. 인터넷상에 유포된 불법촬영물을 수사기관이 강제적으로 삭제할 방법도 없다. 삭제된 불법촬영물은 누군가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돼 있다가 다시 인터넷상에 등장한다. 올리비아는 “불법촬영물 유포 방식과 경로가 이 정도로 다양할 줄은 몰랐다”며 “불법촬영물을 통해 수익이 창출되기 때문에 범죄 수법이 더욱 정교해지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어 “불법적인 게시물을 강제로 삭제할 수단이 없어, 유포를 신속히 차단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을 인터뷰하는 게이즈독스 팀원들/사진=한성주 기자

태초의 ‘빨간비디오’

팀원들은 불법촬영물 플랫폼을 더 추적해 거슬러 올라갔다. 텔레그램, 웹하드, 인터넷 사이트의 시작점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에게서 팀원들은 90년대 세운상가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었던 초소형카메라와 ‘빨간마후라’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변형 카메라 수입·판매에 대한 규제가 전무했던 30여년 전, 세운상가에서는 누구나 몰카를 촬영할 수 있는 초소형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불법촬영은 컴퓨터가 상용화되기 이전부터 이뤄졌고,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유포됐다. 지난 1997년에는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여자화장실에 설치돼 있던 초소형카메라가 발견되기도 했다.

같은 해 아동성착취·불법촬영물 비디오테이프가 빨간마후라라는 이름을 달고 유포됐다. 피해자는 중학생 미성년자였으며, 가해자는 가정용 소형 캠코더를 사용해 영상을 촬영했다. 비디오테이프는 가해자의 친구들 사이에서 복사·공유됐다. 이렇게 유포된 아동성착취·불법촬영물 비디오테이프는 당시 청계천 인근 비디오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됐다.

대체 왜 이 지경까지
30년을 거슬러 올라간 팀원들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기로 했다. 불법촬영물 수요·공급이 지속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로부터 범죄를 근절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와 인권운동가 리아를 만났다.-③에 계속.

*쿠키뉴스는 게이즈 닥스와 함께 모금을 시작합니다. 텀블벅 <한국 디지털 성범죄와 게임체인저 : Gaze Docs>으로 모인 소중한 후원금은 다큐멘터리 ‘Molka’(가제)의 촬영·편집·번역 작업에 쓰입니다.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