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안해서합니다] “흰 종이에 한땀한땀” 점자책 장인 돼보실래요

기사승인 2020-09-17 0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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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안해서합니다] “흰 종이에 한땀한땀” 점자책 장인 돼보실래요
사진=인천 미추홀구 송암점자도서관에서 제작한 점자 도서/ 정진용 기자
[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고 집 안에 머물러 달라” 벌써 몇 달째 정부가 국민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비대면 근무, 비대면 거래가 일상화 되고 있는데요. 봉사활동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로 직접 만나서 하는 봉사활동이 대다수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무기한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에 연간 봉사활동 권장 시간을 채워야 하는 학생과 일반 봉사자들을 위해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일선 교육청에서는 비대면 봉사활동으로 해외원서 번역 또는 우리말 책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통번역, ‘선플달기’, 점자책 제작 봉사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제작을 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해 봤습니다. 점자책 제작을 위해 일반 도서의 텍스트를 한글 문서에 입력하는 봉사활동입니다. 점자도서관에서 필요한 교육(1시간 내외)을 이수하면 됩니다. 준비물은 컴퓨터와 점자책으로 만들 일반 도서가 끝입니다.

지난 11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점자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인천에 있는 유일한 점자 도서관입니다. “오시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송암점자도서관 자료제작팀 반현기 사회복지사가 웃으며 기자를 맞이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교육 자료와 점자 도서 제작을 기다리고 있는 일반 도서 17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신간 소설, 여행기, 역사, 사회과학 등 분야가 다양합니다. 이날 30여분 간 이뤄진 교육은 입력시 주의해야 할 점을 전달받고, 책을 직접 고른 뒤 질문하는 순서로 이뤄졌습니다. 이후에는 이메일로 담당자와 소통하면서 입력 봉사를 진행하면 됩니다.
[아무도안해서합니다] “흰 종이에 한땀한땀” 점자책 장인 돼보실래요
사진=송암점자도서관이 소장한 책 가운데 점역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 정진용 기자

점자책 입력 봉사는 띄어쓰기와 입력 규칙을 잘 지킨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띄어쓰기가 중요하다 보니 띄어쓰기가 ‘v’자 모양으로 표시되는 ‘문단부호 및 조판부호 설정’을 해 놓고 시작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림문자는 모두 ‘*’로 통일하고 다양한 괄호는 따옴표로 대체합니다. 도서명, 지은이, 출판일, 출판사 등 책에 있는 내용은 모두 빼놓지 않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은 설명이 있을 경우 ‘*사진. 설명’으로 대체합니다. 표가 제일 까다로운데요. 표에 있는 내용을 모두 다 일일이 입력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과학 계열 도서는 초보 봉사자들이 어려워 한다고 하네요.

기자는 러시아를 다녀온 한 시인이 쓴 시와 산문을 엮은 서적을 골랐습니다. 규칙이 생소하다 보니 한 페이지를 입력할 때마다 교육 자료를 여러 번 들춰봐야 했습니다. 파일을 확인하지 않고 책만 쳐다보며 타자를 치다가는 컴퓨터 화면에 난데없이 일본어가 나열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0여 장을 입력하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한 줄 한 줄 자판으로 받아치다 보니 눈으로 읽을 때보다 내용이 더 머릿속에 콕콕 박혔습니다. 책에 실린 러시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 설명으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반 사회복지사는 “동화책은 아이들이 읽고 연상할 수 있도록 그림을 아예 다 일일이 설명으로 풀어서 써준다”고 설명했습니다.

봉사자가 입력 파일을 제출하면 도서관 직원들이 직접 교정과 검토 과정을 거칩니다. 입력 기간은 1권당 최대 2달입니다. 숙달된 봉사자들은 일주일에 한 권도 뚝딱해낸다고 하네요. 교정 작업을 하는 데는 1달이 걸리고 도서관 내 점자 프린터기를 이용한 인쇄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가 등록 과정을 거쳐 독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또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한 주에 평균 10~20권 정도의 점자도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도안해서합니다] “흰 종이에 한땀한땀” 점자책 장인 돼보실래요
사진=점자도서 입력 기초교육 자료/ 정진용 기자

 문득 사람이 일일이 입력을 해야 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출판사에서 도서 텍스트 파일을 점자 도서관에 제공하면 제작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텍스트 파일 제공은 의무가 아닙니다. 또 불법 유통 및 저작권 침해 우려 때문에 국내 출판사들은 텍스트 파일 제공을 꺼리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점자 도서관에서 텍스트 입력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죠. 

시각 장애인들이 책을 빌리고 독서도 하던 작은 도서관 역시 코로나19 여파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감염 우려로 도서관은 불가피하게 장기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또 봉사자가 점자로 만들 일반 도서를 도서관에서 대여하지 못하고 직접 구입해야 하다 보니 평소보다는 점자책 제작이 주춤한 상황이라고 하네요.

한국시각장애인도서관협의회 관계자는 “도서관에서 점자책을 만들기 위해 텍스트 파일을 출판사에 요청해도 거절당하기 일쑤”라면서 “반드시 책을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 생활을 위해 일반 도서관에 방문할 수도 있는 것인데 점자책을 비치해 놓는 등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이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점자도서관은 단 39곳입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자점자도서는 총 4497건입니다. 점자 도서관에서는 책을 직접 읽고 음성 도서를 만드는 ‘녹음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점자를 익히지 못한 후천적(중도) 장애인들을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동반자, 스승, 등대. 책을 묘사하는 수많은 표현 중 일부입니다. 다리가 되어 누군가에게 내가 느낀 감동을 전달하고 나누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요. 

jjy4791@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