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기사승인 2020-10-17 07: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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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해마다 할로윈이 다가오면 ‘경찰 코스튬’ ‘승무원 코스튬’ 등이 인기다. 노출이 심하거나 신체를 강조하는 의상이 대부분이다. 드라마에선 간호사가 “수다스럽고 호들갑스러운 아줌마”(SBS ‘의사요한’)으로 설정되거나, 의사의 부하 직원처럼 묘사(MBC ‘병원선’)되기도 한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묘사다. 그간 대중문화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왜곡해왔을까.

대중문화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 그룹 블랙핑크 ‘러브식 걸즈’ 뮤직비디오
■ 업무복에 성적인 코드를 넣는다

YG엔터테인먼트는 소속 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러브식 걸즈’(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에 멤버가 간호사 복장을 한 장면을 넣었다가 빈축을 샀다. 제니가 빨간 하이힐에 짧은 간호복 원피스를 입고 나온 5초가량의 장면이 간호사를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YG는 ‘예술로 봐달라’고 호소했지만, 비판이 거세지자 결국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블랙핑크에 앞서 가수 박미경과 이효리도 각각 노래 ‘핫 스터프’(Hot Stuff)와 ‘유고걸’(U-Go-Girl) 뮤직비디오에서 간호사 복장에 성적인 코드를 넣었다가 홍역을 치렀다. 박미경은 대한간호협회와 법정 다툼을 벌였고, 이효리는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그룹 AOA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에도 경찰, 항공승무원, 해양구조대의 유니폼이 성적인 코드로 재해석된 바 있다.

문제는 이런 ‘가짜 이미지’가 여성 간호사의 모습을 왜곡한다는 데 있다. 실제 간호사들은 신체를 드러내는 간호복을 입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업무에 차질이 생겨서다. ‘섹시 코스튬’으로 소비되는 간호사 복장은 간호사를 ‘전문성을 가진 직업인’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민주노총 산하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5일 낸 입장문에는 “종사하는 성별에 여성이 많다는 이유로 성적 대상화에 노출되고 전문성을 의심받는 비하적인 묘사를 겪어야만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노조가 2018년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간호사 1만1662명 가운데 성희롱·성폭행 등 성폭력을 경험했다는 이는 13.2%에 달했다. 대한간호협회도 “왜곡된 간호사 이미지를 심어주는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같은 선정적인 장면을 예술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중문화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
■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의 경계를 흐린다

2018년 방영한 tvN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유명그룹 부회장 이영준(박서준)과 그의 비서 김미소(박민영)의 로맨스를 그린다. 김미소는 9년째 이영준을 보좌하는 인물로, 까칠한 성격의 이영준이 유일하게 곁을 내주는 상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보스와 비서 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코믹한 연출로 희석되면서 직장 내 성폭력이 떠오를 만한 장면들이 로맨스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극중 이영준은 김미소에게 “일 때문이라면 다른 사람과 스킨십도 할 수 있냐”고 묻다가 같이 엎어지기도 하고, 김미소의 거절을 무시하고 늦은 밤 그의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당시 이영준과 김미소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 업무적 관계를 넘어서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드라마 속 비서의 업무가 상사의 뒤치다꺼리 정도로 축소되는 경우도 있다. 2017년 방영한 KBS2 드라마 ‘저글러스: 비서들’이 그랬다. 첫 회에서 좌윤이(백진희)가 비서로서 한 일은 상사 봉장우(최대철)의 불륜을 들키지 않도록 그의 아내에게 거짓을 둘러대는 것이었다. 드라마 속 또 다른 비서인 왕정애(강혜정)는 상사 황보율(이원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식당에서 생선가시를 발라주고, 엄마의 제삿날에 밥을 차려준다. 비서의 업무가 사적 돌봄 노동으로 그려진 것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도 김미소가 이영준의 넥타이를 매주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넥타이가 둘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메타포였다고 해도, 정말 비서가 상사의 넥타이까지 매줘야 하는 걸까.

대중문화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 기안84(왼쪽)와 웹툰 ‘복학왕’
■ 허구의 ‘꽃뱀’을 만들어낸다

네이버웹툰 ‘헬퍼2: 킬베로스’는 최근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성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반복돼 도마 위에 올랐다. 독자들은 ‘18세 이상 등급임을 고려해도 선정성이 도를 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SNS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게재된 ‘여혐(여성혐오) 논란 정리 짤(사진)’에 따르면 강간, 성착취, 노인 여성 고문 등 예로 든 장면이 전체 247회 중 24회분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는 여성 승무원들이 비행기에 탑승한 기업회장에게 성 상납을 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성희롱·성추행 등에 노출된 실제 여성 승무원과 달리, 웹툰에선 승무원들이 자발적으로 성 행위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를 포함한 웹툰 내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헬퍼2: 킬베로스’를 그린 삭 작가는 사과하며 작품 연재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얼마 전 MBC ‘나 혼자 산다’에 복귀한 웹툰 작가 기안84도 네이버웹툰에 연재하는 ‘복학왕’에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넣었다며 비판 받았다.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여성 인턴이 회식 자리에서 배 위에 얹은 조개 껍데기를 깨부순 뒤 정규직으로 채용됐다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독자들은 여성 인턴의 행동이 ‘성관계’를 암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기안84는 해당 장면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봉지은이 귀여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설정을 통해 이런 사회를 개그스럽게 풍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런 사회”는 허구다. 오히려 현실에서 여성들은 채용부터 인사고과평가, 승진 등의 과정에서 누적적으로 성차별을 겪는다. 능력이 아닌 섹스어필로 일자리를 따내기는커녕,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하고도 실직을 걱정한다. ‘복학왕’으로 논란이 된 기안84는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잠시 불참했다가, 지난달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YG엔터테인먼트, tvN, 네이버웹툰 제공, 박태현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