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잠시 창밖을 봐주세요” 퇴근길 누군가 말을 걸었다

기사승인 2020-11-24 06: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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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촬영 박효상 기자

[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지친 몸을 좌석 깊게 파묻은 승객들. 무표정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SNS, 온라인 뉴스를 확인한다. 눈을 굳게 감은 이도 보인다. 끝이 날 듯 나지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피로감도 더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 풍경이다.

같은 시간, 기관실은 분주하다. 서울역과 검암역을 오가는 공항철도(AREX) 임시열차(전 서울역-인천국제공항 직통열차)는 기관사의 수동 운전으로 움직인다. 전방을 주시하며 각종 계기판도 일일이 확인하느라 이임찬(35) 기관사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검암역을 떠나 시속 100km로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 열차. 기관실은 1분간 작은 라디오 부스로 변신한다. 라디오 DJ 겸 작가는 이 기관사다. “고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열차의 기관사입니다” 바다도 건너고 강도 건너는 공항철도 소속 기관사들이 준비한 ‘감성 방송’이 나오는 순간이다.

공항철도는 일명 ‘뷰(View) 맛집’ 열차로도 불린다. 영종 대교를 건널 때면 드넓은 갯벌과 서해를, 한강에서 가장 긴 대교인 마곡대교를 건너면 서울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영상] “잠시 창밖을 봐주세요” 퇴근길 누군가 말을 걸었다
▲사진=이임찬(35) 공항철도(AREX) 기관사가 지난 17일 서울역 방면 공항철도 임시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박효상 기자

아름다운 풍경을 승객과 나누고 싶다는 소소한 마음이 발단이었다. 지난 2010년 기관사 한두 명이 시작한 방송은 지난 2013년부터 방송문안, 안내방송 경진대회를 열며 본격적으로 공항철도의 자랑이 됐다. 현재는 공항철도 내 ‘감성방송 동아리’ 회원인 11명의 기관사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관사들이 손수 준비하는 대본은 날씨, 시간, 계절에 따라 바뀐다. 동아리 회원간 주제와 내용을 논의하기도 한다. 수년간의 경험이 축적된 과거 문집도 좋은 참고서다. 이 기관사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다시 듣기’하며 공감 가는 구절을 적어놓는다. 어머니에게 용기 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경험을 친구에게 말하듯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코로나19로 따뜻한 말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 커진 걸까. 감성방송이 시작된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지난 7월을 기점으로 공항철도 홈페이지에는 “마음이 뭉클했다” “덕분에 잠시 즐거웠다”는 글을 남기는 승객들이 급증했다. 매달 20건 이상씩 글이 올라오고 있다.

기관사는 반대로 승객이 남기는 한 줄을 보고 힘을 얻는다. 평소 무뚝뚝한 가장이라는 탑승객은 지난 11일 ‘집에 들어가시는 길 빼빼로 하나씩 사서 들어가시는 건 어떻겠냐’는 기관사의 말이 문득 떠올라 처음으로 아내와 딸에게 빼빼로를 선물했다는 글을 남겼다. 코로나19로 직장을 잃고 재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던 한 승객은 얼마 전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취업 준비 기간 힘을 받았다면서 뒤늦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영상] “잠시 창밖을 봐주세요” 퇴근길 누군가 말을 걸었다
▲사진=지난 17일 공항철도 승객들이 감성 방송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박효상 기자

이 기관사는 오히려 승객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는 “혼자 기관실에 있는 기관사도 마스크가 늘 답답한데 승객은 오죽하겠나”라며 “그런데도 마스크를 잘 착용한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어 “공항철도를 많이 이용하는 공항 근로자분들이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입어 안타깝다”면서 “모두가 힘든 시기를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승객을 빼곡히 태운 열차가 마곡대교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방송이 이어진다. “잠시 시간을 내어 창문 밖을 바라봐 주시겠습니까” 승객이 하나둘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후 5시30분, 벌써 어둑해진 한강을 따라 꼬리를 문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도 좋지만 저는 한강을 따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의 빛나는 불빛을 보곤 합니다. 운전자는 자신의 차에서 나오는 불빛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고 있겠죠.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는 사람은 우리의 빛을 느껴도 정작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또한 저 불빛처럼 언제 어디서나 늘 반짝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 잊지 마세요”

지방에서 면접을 본 뒤 귀가 중이라는 정모(30·여)씨는 “피곤하고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정감 어린 목소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말했다. 50대 남성 승객도 “기관사가 승객을 생각해 준비한 마음 자체가 감동”이라면서 “잠시나마 고된 일상을 잊어버릴 수 있어서 위안이 됐다”며 미소 지었다.

jjy4791@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