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머니, 한국 아내, 한국 딸 [원더풀 ‘미나리’③]

이은호 / 기사승인 : 2021-03-06 08: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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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영화‘미나리’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미국 이민 1세대의 이야기인 동시에 ‘K-어머니’ ‘K-아내’ ‘K-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유의 땅’ 미국에서도 한인 가정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질서는 유효하다. 그 안에서 여성은 의사결정권을 갖지 못하는데도 늘 최선을 다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항상 미안해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인, ‘미나리’의 모니카(한예리)가 그렇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모니카의 가족은 아칸소로 이사 온다. 농장을 일구겠다는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의 결정이었다. 제이콥이 마련한 새 집이 바퀴 달린 트레일러라는 것도, 그가 말하던 정원이 실은 농장이었다는 것도 모니카는 몰랐다. 그는 토네이도에 집이 날아갈까 불안하고 병원이 멀다는 게 걱정스럽지만(모니카의 아들은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다), 제이콥은 “다 잘 될 거”라며 무턱대고 낙관한다. 처음부터 모니카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칸소에 적응할 것이냐, 가정을 해체할 것이냐 뿐이었다.

부부는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다. 10년 간 번 돈은 생활비와 시부모를 부양하는 데 썼다. 제이콥은 언제까지 병아리 똥구멍만 보며 살 순 없다고, 자신에겐 꿈이 있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모니카에겐 자신이 뭘 하고 싶고 뭘 하기 싫은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농장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제이콥은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사이 모니카는 제이콥이 진 빚을 갚기 위해 퇴근 후에도 병아리 똥구멍을 들여다보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낸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돈이 없던 부부는 한국에 살던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를 아칸소로 부른다. 순자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여의고 홀로 딸을 키우다가 모니카가 이민을 간 뒤 혼자가 됐다. 오랫동안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 또 한 명의 어머니가 노년기에도 노동의 굴레를 벗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순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모니카는 “내가 이기적이라서 이렇게 된 거”라며 자책한다. 순자는 순자대로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될까봐 성치 않은 몸으로 집안일을 해낸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 이 가련한 모녀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서로에게 못내 미안해한다.

원하는 건 오직 가정을 지키는 것뿐이었던 모니카에게, 제이콥은 말한다. “당신은 그냥 가서 하고 싶은 거 해. 난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내가 시작한 걸 끝내야겠어.” 당당한 가부장으로 서고자 하는 욕망과, 가족을 위하는 마음, 자신의 꿈을 놓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아집이 뒤엉킨 결정이었다. 돈으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제이콥에게, 모니카도 말한다. “상황이 좋으면 함께 사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 말은, 우리는 서로를 구해주지 못하지만 돈은 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던 모니카는 마침내 자신의 결정을 내린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매년 3만 명의 한국인이 미국으로 향하던 1980년대 후반. 고단한 삶을 강인하게 살아온 여성들이 거기에 있었다. 배우 한예리는 지금껏 제대로 주목받은 적 없던 이민 가정 속 여성의 삶을 작품의 중심부로 끌어들인다. 자식의 시선에서 재현된 어머니가 아닌, 당사자로서의 여성이 살아 숨쉰다. “엄마와 이모, 할머니가 갖고 있던 얼굴들, 뭔가 참고 있는 입매, 그때의 눈빛들”([쿠키인터뷰] 한예리 “영화 ‘미나리’, 이렇게 관심 받을 줄 몰랐어요”)을 기억에서 끄집어 모니카의 정서를 빚어낸 결과다. 버라이어티, 할리우드리포트 등 외신은 한예리를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예상 후보로 점치기도 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판시네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