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파이터’ 북한에서 온 진아에게 복싱은 무엇이었나

기사승인 2021-03-11 06: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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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파이터’ 북한에서 온 진아에게 복싱은 무엇이었나
영화 '파이터'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돈 말고 새로운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북한이탈주민 진아(임성미)는 자신을 한국으로 오게 해준 별이오빠의 조언대로 열심히 돈을 번다. 식당일 하나로 부족해 복싱 체육관에서 일을 하다 링에 오른 여성 복서들을 만난다.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복싱을 알려주겠다는 태수(백서빈)의 말을 거절하고 집에 돌아가 복싱 영상을 보는 스스로가 혼란스럽다. 진아의 혼란은 자신을 버린 친엄마를 만난 더 커진다.

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는 북한을 떠나 온 진아가 한국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진아의 어깨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 여러 개 있다. 한국에 홀로 정착할 돈이 필요하고, 중국에 머무는 아버지를 한국으로 부를 돈이 필요하다. 경찰서에 가는 사고를 치면 안 되고, 엄마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진아는 수많은 의무와 할 일에 파묻혀 자신이 누군지 잊는다. 잊어야 버틸 수 있고, 버텨야 내일이 있다.

피곤한 몸을 아침마다 일으키며 인내하는 진아도 복싱을 좋아하는 마음은 숨기지 못한다. 복싱은 진아에게 성공을 담보하는 희망, 혹은 하면 할수록 즐거운 운동이 아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살아있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거울이다. 진아는 복싱을 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이 살고 싶은 시간들로 바뀌는 걸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복싱에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진아의 복싱을 더 보고 싶고 더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쿡리뷰] ‘파이터’ 북한에서 온 진아에게 복싱은 무엇이었나
영화 '파이터' 스틸컷

‘파이터’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영화에서 복싱 경기의 결과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복싱 실력이 성장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진아가 복싱을 시작한 다음엔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과 여러 사건들이 일으킨 파문이 어떤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려진다. 평범한 스포츠 영화 공식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선택은 영화를 향한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다. 북한 출신 인물을 그리는 시선도 전형적이지 않다. ‘마담 B’와 ‘뷰티풀 데이즈’ 등 오랜 기간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만든 감독이 고민하고 깨달은 관점이 잘 담겼다.

‘파이터’의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담아내는 데 그쳤다. 영화에서 진아는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희망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여전히 많은 일들이 그를 힘들게 하고 답답한 마음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당장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을 충분히 설명해주던 영화는 갑자기 진아 주변의 두 남성에게 주목한다. 이들은 진아에게 아버지처럼 위로를 건네고, 애인처럼 사랑을 전한다. 현실에 존재할 수많은 진아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주고 싶다는 메시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걸까. 마지막 장면들은 언뜻 해피엔딩을 의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판타지로 읽힌다.

말하지 않는 진아의 감정과 속마음을 표정과 눈빛으로 전달하는 배우 임성미의 열연이 돋보인다. 클로즈업과 롱테이크가 많은 영화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제 몫을 충실히 해낸다. 진아와 주변 인물들의 실제 호흡을 담아낸 촬영도 인상적이다.

18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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