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9편

곽경근 / 기사승인 : 2021-07-25 05: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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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쿠키뉴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1896년 2월 11일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하는 미명(未明)의 시간, 왕과 왕세자를 태운 두 대의 가마가 서둘러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을 빠져나온다. 문 입구에서 기다리던 러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는 공사관으로 직행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자신과 왕세자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순절(殉節)한 황현은 그의<매천야록>에 “그날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1년 남짓 정동(貞洞)의 아라사(俄羅斯,러시아) 공사관에 이어(移御)하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기록했다.
명과 암 교체하는 고종의 길/ 고종의 피난길은 2016년 9월 복원이 시작돼, 2018년 10월 정식 개방됐다. 고종의 길은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궁장(宮牆)길에서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로,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의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했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해 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 역시 일본 못지않게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광산채굴권, 시베리아 전선 연결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질세라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러시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면서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나라의 중요 이권이 헐값에 외국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덕수궁과 정동 일원/ 1883년 주한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정동 일대엔 각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한 후 이곳을 대한제국(1897∼1910)의 정궁으로 삼았다. 이후 각국의 선교, 의료, 교육기관과 호텔, 상점 등이 줄지어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의 중심지이자 서구 열강의 외교 각축장이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이어를 끝내고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으로 환어(還御)한다. 환궁 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다.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를 올리는 의례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조선이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여 스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온 힘을 모은다.
첫 전차개통식/ 1899년 흥인지문에서 열렸던 전차개통식에 사람들이 문루에까지 꽉차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서울의 전차개통이 놀라운 것은 일본 도쿄(1903년8월22일)보다도 빠른 것이고, 동양 최초인 교토(1895년)나 세계 최초의 전차 개통인 1881년에 비해서도 그다지 늦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1897-1910)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1899년 전차를 개통하고 광산개발과 철도부설,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 전기와 전신 사업 등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제국열강의 탐욕으로부터 국체를 보존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고종의 마지막 희망은 중립국 승인이었지만 이 역시 일본에 의해 무산되었다.
숭례문 지키는 호위무사(수문장)들

600년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한양도성은 총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그래픽=이정주 디자이너

- 대한제국과 서구열강의 낯선 공존, 정동
- 정동일대 서양식 건축물 들어서며 성벽훼손
- 이화학당 내 성벽 추정 사진 발견, 학계 관심
- 고종의 마음 대변하는 회화나무 두 그루 
- 모처럼 언론에 공개된 남대문 문루
- 87년 만에 지워진 일제 잔재 ‘국보 1호’
-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떠난 순성길
정동길 전경

▷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대한제국의 중심지 ‘정동’
정동(貞洞)은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의 주변부에 불과했다. 제국주의 세력 확장이 팽배했던 19세기 말, 정동일대는 서양열강 세력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면서 서양외교의 각축장이자, 근대사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된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경운궁을 중심으로 자주독립을 열망했던 대한제국과 이 땅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은 낯선 공존이 시작되었다. 정동의 첫 서양인 거주자는 초대 주한미국전권공사로 임명된 푸트(L.H.Foote)였다. 정동은 대한제국기 국제교류와 외교의 주 무대이자 신문화의 시작점이었다. 아울러 선교와 교육, 의료의 기지로서 근대사를 써나갔다.
철문으로 굳게 닫힌 영국대사관 저

이처럼 19세기 말 정동일대에는 외국공사관, 학교, 교회, 호텔 등 서양식 건물에서 신식 결혼과 파티가 이루어지는 등 근대시기 새로운 문화의 산실이자 글로벌 공간이었다.
취재에 동행한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정동 인근에 위치했던 한양도성의 훼손은 일제강점기에 도로의 확장과 개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당시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열강의 공사관의 설치, 그리고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등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도성의 원지형 모습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종의 길에서 만난 두그루의 회화나무 중 한 그루/ 두 그루 모두 오랜 세월의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란히 속이 비어있어 관람객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한편 이 같은 격변의 시기,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모두 승리한 일본에 국권을 내주고 백성들은 36년 간 식민통치에 신음하게 된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고 국운이 기우는 시기, 비극의 순간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회화나무 두 그루가 고종의 길 현장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0년 종묘사직의 몰락과 일제 36년의 만행을 한 자리에서 목도한 회화나무는 그 속이 다 썩어 문드러졌다.

- ‘숭례문’ 문루에 오르다.
어렵게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 한양도성의 정문격인 숭례문의 문루에 올랐다. 복원된 성벽(좌 16m, 우 53m)이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지고 숭례문 단청과 도심의 고층 빌딩 숲이 조화를 이루며 600년 한양의 역사를 실감케 한다. 순성길에 함께한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문루와 내부시설물을 꼼꼼하게 살폈다. 지난 2008년 화재로 한층 강화된 감시장치와 스프링클러 등 방화로부터 보호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해 최고 장인(匠人)이 전통 기법으로 복구한 숭례문은 총비용 245억 원, 연인원 3만5000명이 투입되었다.

숭례문 복원 당시 화재 피해를 덜 본 목재를 재활용해 기둥을 세웠다. 숭례문 문루 안으로 들어서니 소방시설과 화재 감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일부분 남아있는 화마의 상처를 보면서 문화재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숭례문의 2층 내부는 화재 당시 타다만 재목을 부분적으로 다시 재활용하였다. 불에 그슬린 기둥을 보니 당시 시뻘건 불기둥과 함께 국보1호가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경관조명이 아름다운 숭례문 야경

 ‘1호’ 타이틀 뺀 숭례문
국보1호 숭례문의 무거운 “1호”가 떨어져 나가고 우리 생활의 문화재로 다가왔다. 문화재청은 지난 2월 문화재의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를 60년 만에 개선했다. 1962년에 제도화한 기존의 지정번호는 ‘내부관리용’으로만 활용된다. 이에 따라 각종 고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으로, 보물 1호 흥인지문은 ‘보물 흥인지문’으로, 사적 1호 포석정은 ‘사적 포석정’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복원’이 아닌 ‘복구’/ 방화로 숭례문이 완전히 멸실(滅失)되지는 않았다. 석축과 1층 문루 대부분이 그대로 남았고, 기존 목재 6만47재가 복구에 재활용돼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숭례문이 국보(國寶) 지위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국보 1호'는 1934년 조선총독부는 국내 문화재를 관리하고 수탈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160여 개 문화재마다 지정 번호를 붙였는데, 숭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한 것이다. ‘1호’의 타이틀을 뺀 숭례문. 7월1일부터 정문과 후문에는 ‘국보 1호’라는 수식어를 뺀 ‘국보 서울 숭례문’ 안내판이 섰다.
숭례문 문루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단청과 빌딩이 조화를 이루며 서울이 600년 고도(古都)임을 말해준다.

 ‘남대문’이란 명칭은
숭례문을 ‘남대문’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될 때 붙어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소문도 오해이다.
옛 숭례문 전경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 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대문을 일제식 표현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에 대한 편견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은 헐렸다.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숭례문 성벽의 일부를 재현해 놓았다. 식민통치를 위해서 후에는 산업발전에 부응하기 위해 헐린 성곽의 흔적을 찾아 나선 발걸음은 늘 무겁다. 비록 도로 신설을 위해 성벽을 허물었지만 그 도로 위에 한양도성의 흔적 표시는 제대로 해야 한다.
숭례문에서 상공회의소 사이 도로에는 한양도성 흔적표시가 없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만 어림잡아 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임을 추측한다.

서울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이 600년 한양의 도성 안으로 들고 나는 일을 각인할 수 있도록 단순히 페인트나 조그만 동판을 박는 것 외에 주요 구간 흔적 표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현 도로 위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숭례문만이 세월을 지키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숭례문 천장의 호법신 문양이다. 힘찬 쌍용의 모습 아래로 시민들이 후문을 통과해 들어서고 있다.

 숭례문 후문 개방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지난 6월22일 부터 국보 숭례문 정문 외에 후문을 추가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숭례문 후문이 일반에 개방되기는 처음으로, 남대문시장을 방문한 관광객이 서울역 쪽으로 난 정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장과 가까운 후문을 통해 쉽게 숭례문을 볼 수 있게 됐다. 후문 개방 시간은 정문과 같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상공회의소 초입 성벽 옆에 선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상공회의소를 지을 때 시굴조사를 했지만 이 일대에서는 성곽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 쌓아 놓은 것은 복원이 아니고 재현이다. 시굴조사 당시 20m가 채 안 되는 17m 정도의 뒷채움 흔적만 나오고 성돌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쌓아 놓은 성돌 들은 주변에 산재해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빌딩 주차장 담벼락에 위치한 소의문(昭義門)터 푯돌

 - 사라진 성돌과 소의문 터
대한상공회의소 옆 도로에 일부 재현해 놓은 성벽을 따라 묻히고 잊혀진 순성길을 나선다. 빌딩 숲 사이로 300여 미터를 걸으면 바로 서소문고가차도가 순성길을 막아선다. 안내도에 따르면 왼쪽으로 내려 가야하지만 일단 오른쪽 중앙빌딩 주차장 담벼락에 위치한 소의문(昭義門)터 푯돌을 만난다.
옛 소의문 전경/ 소의문(昭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소문이다. 또한 소의문은 강화군 또는 인천군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에 내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진다.

서소문(西小門)이라 불리는 소의문은 1396년(태조 5)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면서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그 후 300여년이 지난 영조 20년 (1744년) 문루(門樓)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으로 고쳤다. 서소문동 큰길에 있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 구실도 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진다.
아펜젤러기념공원/ 배재학당 맞은편의 아펜절러 기념공원 전경. 공원 앞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면서 조경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아펜젤러 공원과 배재학당
서소문고가차도 건너편 평안교회 골목으로 들어서자 공사가 한창이다. 한양도성이 지나던 길에 들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정비되고 있었다. 옛 배재학당 뒤편에 아펜젤러 기념공원이 있고, 러시아대사관 옆에는 배제공원이 있다.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설립한 곳이며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독립신문을 발간한 곳이기도 하다. 공원 기념 동판에는 “맨손체조를 비롯해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라고 적혀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내부 관람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서양식 학교건물로서 옛 배재학당 동관교사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뜻에서 ‘영어학교’로 불리다가, 1886년 고종이 ‘배양영재(培養英材, 훌륭한 인재를 양성함)’의 줄임말인 ‘배재(培材)’라는 교명을 하사하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전경/ 처음 2칸짜리 한옥에서 시작한 배재학당은 주변의 한옥과 대지를 구입한 후 1887년 아펜젤러가 정동의 전망이 좋은 언덕에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을 지었다.

배재학당 동관은 ‘아펜젤러 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배재학당의 첫 교사가 불에 탄 이후에는 배재학당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의 1927년 졸업앨범 단체사진/ 학교운동장의 회화나무와 한양도성 성곽 주변에 모여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학교 건물로 사용되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에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곳에는 설립자인 아펜젤러의 유품을 비롯해 고종에게 하사받은 현판, 시인 김소월 등 배재학당 출신 인재들의 유물들이 함께 전시됨으로써 한국 근대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전경/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고종황제는 ‘배꽃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라’는 뜻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을 1887년(고종 24년)에 하사했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현재 이화박물관 건물로 사용되는 심슨기념관은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의 가족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에 건립되었고, 1922년에 증축하였다. 이후 6.25 전쟁 때 붕괴 되었다가 1961년에 복구하였고,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2011년에는 박물관 외관을 원형 모습으로 복원 공사 후 재개관 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세워진 벽돌 건물로 전면의 아치창과 화강석 키 스톤(Key Stone)이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을 둔 중복도식 교실 배치다.
심슨기념관 전시실에서 찾은 한양도성 성벽 흔적/ 농구대 뒤로 한양도성 성벽이 보인다.
박물관 내에는 이화 동문들의 기증 유물을 전시하는 기증전시실, 옛 교실 형태의 유관순교실에서는 이화학교 역사를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화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교육자료를 전시중인 상설전시실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근대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쿠키뉴스 취재팀은 1층 전시실의 전시된 옛 사진들 중에서 농구대 뒤로 한양도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을 찾아내는 성과도 거뒀다. 신희권 서울 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시 배재학당에서의 성벽사진은 발견된 적이 있지만 이화학당 내부의 성벽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심슨기념관 정원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유관순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용했다는 우물터를 만날 수 있다.
중명전 전경/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이 민간소유였던 중명전을 2006년 인수,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을사늑약의 치욕/중명전
중명전(重明殿)은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이다. 중명전 터는 원래 궁궐에 포함되지 않은 땅으로 미국인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의 거처였고, 왕실도서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있다가 1901년 11월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1902년 5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지금의 2층 건물로 재건축 된 것이 중명전이다.

중명전 1층 전시실에 재현해 놓은 을사늑약 체결 현장. 왼쪽부터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하야시 곤스케(일본 정부 특명 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외부대신), 한규설(참정대신), 민영기(탁지부대신), 이하영(법부대신) 순이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정동제일교회 전경/ 이 일대는 미국공사관이을 비롯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위치하면서 미국문화와 교육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중심지였다.

 - 언덕 위 아름다운 교회당/정동제일교회
미국과 영국의 공관 부지가 정동에 마련된 이후, 곧이어 입경한 서양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1884년 가을 의료선교사로 온 알렌(H,N.Allen)을 비롯해 언더우드(H.G. Underwood), 아펜젤러(H.G. Appenzeller), 스크랜튼(W.B. Scranton) 등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공사관 주변을 따라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의 서울 진출을 허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병원과 학교에 한해 사업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예배는 선교사들의 사저에서 조용히 행해졌고, 선교를 위해 의료와 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897년 10월 무렵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로 지어진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최초 기독교 감리교의 교회 건축물이다. 1977년에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미국 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입국한 알렌선교사의 집에서 첫 공식주일예배가 드려지고,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교사나 의사 신분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그 산물이다. 이후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로 선교가 이뤄졌고 배재학당의 설립자였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 조선인의 집에 현판을 내건 벧엘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모태가 된다.
정동제일교회 내부 전경

1895년 9월에 착공된 정동교회는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에 완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초기 라틴십자형에서 증축을 거치면서 양쪽에 통로를 덧붙여 장방형으로 변경하고 고딕 교회의 뾰족 첨탑을 삼각형의 박공지붕으로 대체하였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중앙 통로와 양측의 삼랑식 구조로 단순화된 고딕 형태로 교회 창문의 모델이 된 첨두아치와 격자무늬 장식창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평천장에 별다른 장식이 없고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1900년대 초 남산에서 본 서울 전경/ 멀리 2층 누각의 남대문이 보이고 성 밖으로는 초가집들과 성 안으로 기와집과 신식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은 주변의 높은 빌딩에 가려 왜소해 보이지만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중인 고종의 눈에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부의 눈에나 정동교회 붉은 벽돌건물은 탄복을 자아냈다. 믿지 않는 이들도 이 건물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1897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1890년대 말 100평이 넘는 공간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붉은 벽돌의 고딕식 예배당은 언덕 위의 신식 건물로 단연 장안의 명물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7년 3월, 지역의 주민과 직장인을 위해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서 열렸던 월요 정오 음악회. 

이 예배당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 속에 자주국가의 의지를 담아 대한제국을 선포한 역사의 현장에 10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언덕 밑 정동길 조그만 예배당’은 그 자리에서 내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창덕여중 뒷편 담자락에 일부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 정동길 구간에서 유일하게 성곽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땅속에서 찾은 성곽길/창덕여중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던 한양도성 성곽 기초부가 창덕여중 지하에서 발굴됐다. 이와 함께 1896년에 완공된 프랑스 영사관 터도 함께 발견됐다.
지난 2010년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중구 정동 27-3번지 일대 창덕여중 증ㆍ개축 예정지 4414㎡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서울성곽 기단부 16.8m 구간을 확인했다.
옛 프랑스공사관과 한양도성/ 프랑스공사관은 프랑스 전권위원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1887년 서울에 부임하면서 짓기 시작해 1896년 완공됐다. 프랑스 건축가 살르벨르(m. Salebelle)가 했고 프랑스 바로크 스타일로 설계했다.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본체와 5층 높이의 옥탑으로 구성됐다.

조사 결과 서울성곽은 1~2단 정도가 남은 것으로, 기반암을 정비하고 적갈색토를 다져 바른 다음에 장대석을 놓아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벽의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조사지역 주변 서울성곽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이를 기반으로 창덕여중 뒤편에 성곽길이 조성되었다.
고종의 길 입구/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남짓 머무르다 덕수궁(경운궁)으로 이어했다. 일국의 왕이 외국의 공관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수모를 감내하였지만 고종은 이곳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공사관에서 대신들과 만나 자주적인 개화를 준비 했고, 경운궁(덕수궁)을 수리하고 확장시켜 환궁 후 대한제국을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국치의 길/고종의 길
‘고종의 길’은 을미사변(1895) 이후 1896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약 120m이다.  ‘고종의 길’ 복원은 2011년 정동부지 교환 시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지난 2017년 말 완료했다.
‘고종의 길’은 훼철되고 왜곡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근대사의 생생한 역사현장을 기억하고 돼 새기는 역사 교훈 길이다. 관람객이 속이 비어 있는 회화나무(사진 우측)를 지나고 있다.

125년 전 수모를 무릅쓰고 이 길을 택했던 고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엄상궁(영친왕의 생모)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 나간 ‘고종의 길’ 곳곳에는 근대사의 아픔이 깊게 새겨져 있다. 치욕의 길 초입 오른편의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일제의 한반도 수탈을 증언하는 2층 건물이다. 높다란 궁궐 담에 가려진 ‘고종의 길’ 좌우편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아직도 미국의 땅이고, 영국의 땅이다.
고종의 길에 위치한 속이 텅 빈 회화나무

덕수궁 구역에 서 있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고종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서방열강의 각축에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서있고 팔 다리 잘려나간 황제의 마음은 썩고 녹아내려 속을 텅 비웠다. 백성의 마음은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속절없이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역사의 현장에서 문전옥답 다 내어준 백성들의 마음 역시 나라님 마음이나 같았을 것이다. 영욕의 역사를 증명하듯 속은 텅 비고 굳어버린 껍데기만 남았지만 회화나무 두 그루는 올 여름에도 푸른 잎을 내어 폭염에 지친 시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나라를 지켜라, 내 땅을 지켜라’ 웅변하는 듯하다.
구 러시아공사관 전경/ 현재 내부 수리 중으로 아쉽게 관람이 불가하다.

-대한제국의 랜드마크/구 러시아 공사관
고종의 길 끝자락 솟을대문을 지나면 정동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왕실의 정원인 상림원(上林苑)이 있던 곳으로, 수목이 무성하고 정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다. 이곳에 러시아공사관이 건축되었다. 고층건물이 없었던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에서 한양도성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며, 건물 또한 한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1884년(고종 21)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러시아 정부는 공사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지하 1층, 지상 1층에 3층 탑부로 이뤄진 석재와 벽돌조의 '서양식' 공사관건물은 러시아건축가 사바틴(A. I. Seredin Sabatin)의 설계로 이뤄졌다. 그는 1883년에 입국하여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귀국하기까지 20여 년간을 우리나라에 체류하며 많은 근대건축물을 남긴 개화기의 대표적 서양인 건축가였다.
3층 높이의 러시아공사관 탑

지금의 러시아공사관은 3층 높이의 탑만 남아 있지만 1890년 준공 당시에는 규모 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공사관을 능가했고 정동 언덕에 위치한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광복 후에는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된 적도 있는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중 탑 부분과 지하층 일부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1973년 서울시에서 남은 부분을 보수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했고 1977년에는 국가 사적 제253호로 승격됐다. 1981년에는 서울시에서 건물을 재보수해 주변을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다. 현재 구 러시아공사관은 수리 중으로 관람은 불가하다.
경교장 집무실 전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경교장
광복을 맞이하고 3개월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의 땅에서 첫 밤을 맞이한 곳이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그로부터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까지 3년 7개월, 정확히 1310일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으며 남북통일운동의 본산이었고 백범 암살의 현장이다.
해방 다음 해, 경교장 앞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1946년 1월)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금광(金鑛)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친일 기업인 최창학 소유 자택으로 본래는 '죽첨장(竹添莊)' 혹은 ‘죽첨정(竹添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게 되면서 분위기를 파악한 최창학이 헌납한다. 왜색(倭色)적인 분위기가 짙은 이름을 김구 선생이 근처에 있던 경교(京橋)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 개명하였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향해 쏜 총알이 뚫고 지나간 유리창이 재현되어 있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경교장이라고 불렸으며 민족진영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종로구 평동의 강북삼성병원 초입에 위치한 경교장(사적 제465호)

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이후 오랜 기간 대사관 및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변형된 내부 평면을 철거하고, 이 과정에서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최대한 원형을 살려 복원하였다. 그렇지 않은 부분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1938년 8월호)에 수록되어 있는 경교장 도면을 근거로 하여 복원하였다. 복원된 경교장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유물과 영상, 정보검색코너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사라진 서대문 디지털로 복원되다/돈의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은 지금은 사라진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 신도로건설 명목으로 헐리기 전 돈의문 전경/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돈의문은 1396년 처음 세워졌으나 1413년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422년 현재 정동 사거리에 다시 세워졌다. 이때부터 돈의문에는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골·새문안 동네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도로확장을 이유로 돈의문을 철거했다. 돈의문은 서울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 속에만 남아있는 문이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대에 서전문(西箭門: 서살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정동의 끝자락인 경향신문 앞 대로에서 본 돈의문 터와 돈의문박물관마을 전경.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임에도 일제에 의해 헐값에 덧없이 철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 도로 건너편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던 서울 돈의문이 104년 만에 디지털 기술로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전면 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다. 다행히 서울시가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 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동네를 허무는 대신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서울형 도시재생방식을 선택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박물관마을은 돈의문 안쪽 일대인 새문안 동네의 역사를 바탕으로, 1900년대 중반 주거와 상업 목적으로 사용된 건축물을 활용하여 조성되었다. 본래 돈의문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이 2014년 종로구에 해당 부지를 기부채납 함에 따라 당초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으나, 역사 문화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박물관마을로 변경되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돈의문 지역의 역사와 재생을 소개하는 돈의문 전시관,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시설, 6080세대의 추억이 살아 있는 아날로그 가득한 감성공간이다. 100년의 시간이 중첩된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역사 체험 마을로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돈의문역사관, 근대 개항기 공간, 6080 레트로 공간을 테마로 한 마을 전시관과 체험교육관, 이외 서울도시건축센터, 이용객 편의시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도시 조직을 일부 활용하여 역사문화자산에 집중한 문화형 도시재생의 사례로써, 전면 철거 후 신축하는 기존 재개발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평가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은 시대별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조선시대의 서울관'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주로 후~말기의 모습을 전시한다. 수도 한양의 건설과정부터 육조거리와 북촌, 남촌, 중촌, 운종가 등을 모형과 영상으로 전시한다.

- 서울을 기억한다./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서울歷史博物館, Seoul Museum of History)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수도 서울의 장소와 역사를 기억 저장하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상설전시실에서 기획전시실, 기증유물전시실, 교육실, 강당, 뮤지엄샵, 전통문화체험교실, 아이좋은 박물관 등 다양한 전시시설, 교육,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2층 로비 벽면에는 1929년경 서울의 모습과 2009년 서울의 파노라마를 통해 구한말 서울과 현대 서울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1929년 전경은 왼쪽 북한산 자락부터 오른쪽 남산에 이르기 까지 사대문 안의 모습을 모두 5장의 사진으로 담아냈다.  사업가이자 기자였던 앨버트 테일러가 취재 등의 목적으로 확보해서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궁이 해체된 이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을 2002년 5월 개관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영조 36년인 1760년,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경복궁,경희궁,덕수궁,창경궁,창덕궁 등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본래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당시 대부분 훼손되었다.
올 여름 장마가 끝을 알린 지난 20일, 휴일을 맞아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흘러가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해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했다.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 터는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남대문 문루에서 본 시청방향 도심 전경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 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