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발언에 화들짝 “120시간 노동, 사람 잡아요” [게임업계 노동현황①]

기사승인 2021-08-06 06: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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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발언에 화들짝 “120시간 노동, 사람 잡아요” [게임업계 노동현황①]
일러스트=이정주 디자이너

[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1. 10년차 개발자 A씨는 2013년 과중한 업무강도로 급작스럽게 건강 악화를 겪었다. 당시 그는 게임 출시 일주일을 남기고 주중 연속 야근에 주말 출근을 병행했다. 5일 내내 자정을 넘겨 퇴근하면서 하루 평균 업무시간은 15~16시간에 육박했고, 거기에 주말 근무를 포함하면 대략 100시간 가량 일한 셈이다. 강행군 이후 일주일의 휴가를 썼지만, A씨는 후유증을 혹독히 겪었다. 휴가기간을 포함한 열흘은 거의 탈진한 채로 지냈고, 중간에는 현기증으로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기도 했다.


#2. 7년차 개발자 B씨는 게임 이벤트 기간 3주 동안 새벽 4시에 퇴근하고 다시 오전 10시에 출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야근이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겠지만, 주 2회 이상 야근이 지속되니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누적됐다. B씨는 이 기간 심각한 번아웃을 겪었고, 퇴사를 고민하게 됐다.

尹 발언에 화들짝 “120시간 노동, 사람 잡아요” [게임업계 노동현황①]
사진=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판교테크노밸리. 판교테크노밸리 홈페이지 화면 캡처

과거 게임 업계는 크런치 모드(게임 개발 막바지에 밤을 새우며 작업하는 상황)로 악명 높았다. 잦은 야근이 업계 관행으로 여겨지면서 판교나 구로 등 게임사가 몰려있는 지역은 밤늦게까지 환하게 불이 켜진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 배’ 등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었다. 그러나 2010년 후반부터 이러한 흐름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고 지금은 게임업계 전반의 업무환경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 국민의 힘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의 이른바 '120시간 발언' 이후 또다시 게임업계의 장시간 노동실태가 화두에 올랐다. 지난달 19일 윤 후보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스타트업 청년의 말을 인용해 현 정부의 주52시간 근무제를 비판했다. 윤 후보는 “노동 유연성을 확보해도 기업이 훨씬 사업하기 좋아지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노동시장 유연화도 주장했다.

윤 후보는 “청년 세대들의 스타트업 애로사항을 들어보기 위해 회의에 간 적이 있는데 이 분들이 주 52시간제도 시행에 예외 조항을 둬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했다”며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게임업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여전히 야근에 시달리는 개발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이 나온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120시간동안 일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상상이 안 간다”고 밝혔다. 

주 120시간 업무시간을 위해서는 산술적으로 5일 내내 잠도 없이 꼬박 일해야 한다. 또한 7일 내내 아침 7시부터 일만 하다가 밤 12시에 퇴근해도 1시간이 부족하다. 
尹 발언에 화들짝 “120시간 노동, 사람 잡아요” [게임업계 노동현황①]
사진=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공동취재사진

윤 후보의 발언은 게임업계의 오랜 관행인 크런치 모드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크런치 모드는 장시간 업무로 인해 개발자들의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일과 삶의 균형)’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이 68시간 이전이었던 2018년 당시에는 크런치 모드의 강도가 더욱 강했다. 주중 52시간까지 근로가 인정됐고, 토요일과 일요일의 8시간 근무는 휴일근로로 판단돼,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았다. 메이저 게임사 관계자는 “평일 야근을 연달아하면서 주말에도 출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출시된 게임은 대부분 24시간 지속되는 라이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에 실시간 점검 대응과 QA(게임이 일정 수준의 품질이 되게끔 테스트 및 검수를 맡는 업무)가 매우 중요하다. 초과 근무가 불가피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또한 게임 론칭 직전 혹은 대규모 업데이트 때도 크런치 모드가 가동된다.

이밖에 대형 게임사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성과지상주의가 과도한 업무환경을 조성했다는 시각도 있다. IT 종사자들은 높은 연봉을 받는만큼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야한다. '성과가 없으면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야근이 당연시되는 관행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6년 N사에 근무하는 30대 직원이 심장동맥경화(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게임업계의 과도한 크런치 모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근로복지공단은 해당 직원의 사망원인을 ‘업무상 재해’로 받아들여 유가족의 급여 청구 신청을 받아들었다. 크런치 모드로 인한 업무상 재해가 처음으로 인정된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노동정책 개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국회는 2018년 2월 28일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2019년부터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는 게임사도 하나 둘 씩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확실히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이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눈치를 보면서 야근을 하는 경우도 줄었다”며 “지난해부터 야간 러닝 동호회를 들어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데, 확실히 전보다 건강도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尹 발언에 화들짝 “120시간 노동, 사람 잡아요” [게임업계 노동현황①]
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연초 발간한 '2020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는 업계 노동자의 응답 비율은 2019년 60.6%에서 지난해 23.7%으로 크게 줄었다. 크런치 모드의 평균 지속일 수는 7.5일로 2019년 16일보다 감소했고. 연장 근무 이후 휴식보장도 이전보다 개선된 것으로 확인됐다.

52시간 근무제 시행 초반만 해도 업무 시간을 줄이면 게임 출시에 약영향이 갈 것이라는 우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든 대신 업무 효율성을 높이 질적 성장을 도모한다는 방침이다. 중견 게임사 홍보팀 관계자는 “야근이 관행이던 시절에는 정규 업무시간에 해야할 일을 미뤄 야간에 처리하는 사람도 많았다”며 “현재는 시간 내 집중도 있게 업무를 진행하는 기류가 자리잡혔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 나은 노동환경을 위해서는 포괄임금제와, 재량근로시간제 등 관련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포괄임금제는 노동자가 계약을 맺을 때 일정액의 시간 외 노동 수당(제수당)을 정해 매월 기본임금에 포함해 지급하는 임금 산정 방식이다. 장시간 노동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현재 3N(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과 몇몇 대형 업체 제외하면 아직까지 적지 않은 게임사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52시간 근무제가 안착하려면 인력 증원, 업무 유연성도 확대돼야 한다”며 “몇몇 회사의 경우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어도, 포괄 근무제가 적용되면서 사실상 추가근무 이후에도 추가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52시간이 시간이 넘으면 그냥 기록 없이 일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윤 후보자의 120시간 발언이 현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52시간 근무제에 대한 보완사항을 지적한 이 관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52시간제 도입으로 근로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생긴 것은 사실”이라며 “만약 윤 후보의 발언처럼 업무 환경이 바뀐다면, 또 다시 비극이 나올 수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sh04khk@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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