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랑스런 애국지사, 계룡의 '한훈' 선생

오명규 / 기사승인 : 2021-08-22 19: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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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우 (충청메시지 대표)

충남 계룡시 정장리에 개관한 독립유공자 송촌 '한훈 기념관' 모습.

조성우 충청메시지 대표
한훈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지 71년이 지난 76주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정장리 273-2번지에서 한훈 기념관을 개관했다.
 
한훈 선생(韓焄, 1889-1950)은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에서 1889년 3월 27일 아버지 한성교와 어머니 성자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명은 한우석이며 가명으로 만우, 동열, 조선달 등을 썼고 자는 성초, 호는 송촌이다.

1906년 한훈 선생은 18세의 나이로 홍주의병에 참전하게 된다. 이는 선생이 독립운동에 몸담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의병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칠갑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외숙의 유언을 듣고 친형 한태석과 함께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한다는 목적으로 참여했다.
 
홍주의병 이용규 휘하에 소속되어 부여, 노성, 연산, 정산, 공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7년 홍주 의병이 실패하자 선생은 신도안에서 은거하며 나철, 기산도, 오기호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지만 나철이 일경에 체포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악질 직산군수를 처단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행은 선생의 항일투쟁에 또 다른 기회였다. 뜻을 같이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게 됨으로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 항쟁할 목적으로 귀국한 선생은 채기중과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여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선생은 조국광복을 향한 의지로 국내에 잠입하여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지역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의 광복단이 연합하여 조직한 단체로 계몽운동계열의 공화주의 정치이념과 의병전쟁의 무장투쟁방략을 서로 수용해 통일된 형태의 운동노선을 지향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조달 ▲혁명기지건설 ▲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국내 혁명단체로 다음과 같은 실천강령을 제정했다.①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본회의 군사행동ㆍ집회ㆍ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 요지와 북경ㆍ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ㆍ광무소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ㆍ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선임하고,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지역 책임을 맡아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에 전력을 다했다.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보내고 자발적인 의연금을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친일부호의 처단 등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파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1917년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고 충청지부에서는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부호와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면서 1916년 보성에서 양재성, 별교에서 서도현을 처단했다. 이밖에 서도현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하여 1만원의 군자금(1917년)을 모집했고 전북 순창의 오성(烏城) 헌병분대를 습격(1917년)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이처럼 선생의 눈부신 의열투쟁은 비밀리에 완벽하게 수행하여 대한광복회의 혁명목적을 수행하며 선도했다. 그러나 장승원ㆍ박용하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고 단원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이런 상황에도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대한광복회의 명맥을 이어갔다.
 
선생은 만주를 오가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법을 모색하던 중, 3ㆍ1운동을 계기로 다시 국내로 잠입해 우재룡(禹在龍)ㆍ권영만(權寧萬)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김상옥 의사와 동지 일동(1948년). 김상옥과 활동했던 한훈ㆍ명세재ㆍ윤익중ㆍ김동순ㆍ신화수ㆍ서대순 등이 함께 촬영한 모습.(한훈 선생, 앞줄 맨 오른쪽).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서울을 중심으로 광복단결사대 조직계획을 설명한 후 지원을 요청했다. 임정의 지원 약속을 받은 선생은 1919년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한 후 모병(募兵)과 암살(暗殺)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에 요원을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고 그 중에서 암살단원을 선발하여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그리고 민족반역자와 조선인 형사를 처단할 것을 목표로 했다.
 
선생은 1920년 7월 중국 안동으로 들어가 임시정부 파견 요원으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제공받아 압록강을 건너 국내 반입에 성공함으로서 광복단결사대가 무기를 갖추고 국내에서 의열투쟁의 기반을 갖추게 됐다.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한 후, 선생은 전라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면서 의열투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광복단 결사대가 조직되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을 때, 김상옥(金相玉)을 중심으로 암살단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암살단은 친일 조선인과 형사를 처단하고 조선인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군자금을 길림군정서에 제공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암살단의 취지와 목적은 선생이 주도하던 광복단 결사대의 목적과 같았다.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은 첫 거사로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미국의원단이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 암살단취지서 및 통고문ㆍ경고문을 환영군중들에게 살포하고 자동차를 이용한 사격전을 계획했다.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가서 총독 이하 일본 관리들을 처단하는 한편,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관공서와 일본경찰서 등을 폭파한다는 계획이다. 통고문은 이때 조선인으로 중추원 참의나 일제 고등관이 된 자들의 대상이고 경고문은 조선인 형사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등(君等)은 조선의 혈통을 받고 배달민족이란 긍지 아래 살아 왔거늘 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 하늘이 뜻이 있다면 어찌 천벌이 없을 것이며 신(神)이 뜻이 있다면 어찌 재앙이 없을 소냐! 아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무리여 그러고도 오히려 생명을 보존코자 하니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한번 기회가 오면 누가 너희들의 일편고기를 회치고 싶지 않을 자 있으며, 한 줌의 소금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자 있으랴! 그 후에 남을 너희들의 자손은 또한 어이 하려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보내려는가 또 어느 지옥의 한 모퉁이에 방황케 하려는가? 오늘날 저 철창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누구 때문인가?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들이거늘 군들은 이 의혼(義魂)을 죽이는 마귀에 그치려는가? 더 말하지 않겠노라.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린 자로서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그러고도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여 보라. 

그러나 미국위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1920년 8월 23일 일제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김상옥의 집을 수색 당했다. 김상옥은 일경이 집을 수색하기전 탈출했으나 선생은 김동훈 등 동지 15명과 함께 체포돼 조선총독 등 암살계획은 실패했다.
 
광복단 결사대장으로 활동한 선생은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임했다. 징역 8년이 선고되어 복역중에 서도현 처단사건과 서인선에게 군자금 활동이 발각되면서 4년 형이 추가되었다. 옥고를 치르는 중에도 단식을 통해 일제에 투쟁하는 등 불굴의 저항의지를 표출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29년 2월 22일,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1929년 11월 8일, 군자금 모금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가중처벌로 10년형을 받고 1941년 출옥했다. 19년 6월의 옥고로 얻은 병과 일제의 감시로 출옥 후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충남 신도안에 은거하며 학병 거부자와 탈출병 등을 은신시키고 이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선생은 해방 후 1945년 11월 광복단을 재건하고 12월 5일 국내외 정세파악을 위해 내외사정조사위원회(회장 한훈)를 창립했다. 1946년 3월, 광복단 중앙본부(총재 조소앙, 부총재 신익희 단장 한훈, 부단장 김동순)와 서울지부(지부장 현건운)를 설치했다.
 
4월 8일, 광복단 신도지부(지부장 김근한)를 설치하고 신도안에 순국선열봉안전(충렬사)를 건립하여 이곳에서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추도회를 실시했다. 더불어 광복정신으로 자주적 독립국가 완성을 목표로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단체가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재건 광복단은 (광복단재흥의 동기)에서 그들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조국의 주권을 광복하자 2. 건전한 자주독립국가의 완성 및 발전을 도(圖)하자 3. 세계안전과 평화를 도(圖)하자이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광복단은 ▲광복 정신의 철저화 운동 ▲국민 조직의 단결화 운동 ▲농촌산업의 건전화 운동 ▲경제생활의 자력화 운동 ▲민족문화의 창조화운동 ▲세계인류의 평화화운동을 실천강령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광복단에서는 ▲광복의숙(光復義塾) 설립 ▲실험농장(實驗農場) 설치 ▲동서문화연구회 조직하여 민족교육과 산업을 부흥시키고 내외사정조사회(內外事情調査會)를 통해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개발, 계승하려고 했다.
 
광복단의 지부는 선생이 거주하던 신도안에 설립된 신도지부가 대표적이다. 신도지부에서는 대전과 신도안에서 반탁시위를 주도했는데, 당시 광복단의 활동은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많은 애국단체들의 좌표가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3년 미국군정을 실시한 후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을 제정하였고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반민족행위 예비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오전, 이승만은 경찰 50명을 동원하여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일명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친일청산을 할 수 없도록 무력으로 해산시켰고 20일 후인 6월 26일, 안두희(육군 소위)가 독립운동 애국지사인 김구 선생을 저격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김구 선생 서거 1주년이 되던 김구 선생 첫 제삿날 새벽에 6.25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평생 생사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으로 살아온 한훈 선생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휘하며 상해임시정부 수반을 지낸 김구 선생을 살해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일제에 충성하며 독립군 토벌에 공을 세운 친일 군ㆍ경을 중용했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공산당으로 매도함으로써 독립운동한 것이 죄가되어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6.25 전쟁 중 인민군 복장을 한 군인이 선생의 집을 찾아와 정중하게 모셔간 후 풍문으로 총살되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피살되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한훈 선생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 중에도 군ㆍ경을 동원해 보도연맹 회원과 양심수를 비롯한 죄수 등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독립운동 공훈은 해방후 23년이 지난 1968년 3월, 정부는 한훈 선생의 공훈을 기린다면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에 한훈 선생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세우자 우리나라 우리손으로, 독립한 정신없이 독립은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에 한훈 선생의 '세우자 우리나라 우리손으로, 독립한 정신없이 독립은 없다. 송촌 한훈'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그들은(한국) 우리(미국)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드럼프 미국 대통령의 어록(2018년 10월 10일 백악관 집무실)이다.

그럼, 김구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는 누구인가?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의 자택인 경고장에서 권총으로 선생을 저격한 미국방첩대(CIC)요원 안두희 소위에 대해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 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당수 김구)의 음모에 맞선 ‘의거’로 규정했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 선고를 받았으나 3개월 후인 11월 징역 15년으로 감형됐다. 서울육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고 7월 10일 육군 소위에 원대 복귀하여 9월에 중위로 진급하는 등 가석방 기간에 2계급을 특진했다.
 
1952년 2월 15일, 형 면제처분을 받고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1군 사령부 전 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간 창업하여 경영했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저격했지만 중형을 면했고, 석방 후에는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줌으로써 공권력에 의한 특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