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렁 숨소리에 ‘소오름’…‘홍지킬’의 마력 [쿡리뷰]

이은호 / 기사승인 : 2021-11-16 06:00:02
- + 인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출연하는 배우 홍광호.   오디컴퍼니 제공

‘그릉, 그르렁.’ 목에서 쇠가 굴러다니는 듯한 숨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사람이 내는 소리인가, 짐승의 목 울림인가. “모든 게 정상. 기대 이상의 발전! 자유!!” 단 3분 만에 유능하고 열정적인 의사에서 잔인한 악당으로 변신한 이는 뮤지컬 배우 홍광호. 그는 지난달 10일 개막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주인공 지킬·하이드를 연기하며 선악의 극단을 오간다. 2008년부터 네 시즌 째 ‘지킬 앤 하이드’에 올라 탄 그는 풍부한 성량과 시시각각 변하는 음색으로 관객을 집어 삼킨다.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각색한 ‘지킬 앤 하이드’는 한 인간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1997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만, 국내에선 2004년부터 17년간 누적 관객 15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오고 있다. 오리지널 대본과 음악을 수정·각색·번안해 한국형 공연을 완성한 덕이다. 올해는 홍광호를 비롯해 초연을 이끌었던 류정한과 새 얼굴 신성록이 지킬·하이드 역에 캐스팅됐다. 지킬의 약혼녀 엠마는 조정은·최수진·민경아, 지킬을 사랑하는 클럽 무용수 루시는 윤공주·아이비·선민이 연기한다.

배경은 1888년 영국 런던. 의사이자 과학자인 헨리 지킬은 정신병을 앓는 아버지를 위해 인간의 정신에서 선과 악을 분리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임상 실험을 앞두고 이사회 반대로 실험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지킬은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실험은 성공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으로 가득 찬 제2의 자아 하이드가 지킬을 장악하고, 지킬은 약혼녀 엠마와도 점점 멀어진다. 설상가상 하이드가 정신 분리 실험을 반대한 이사들을 하나 둘 살해하면서 런던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지킬 앤 하이드’ 속 홍광호.   오디컴퍼니 제공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25피트(7m62㎝)의 거인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이 강렬하고 자신감 넘치고 아름답다”고 평한 홍광호는 목소리만으로도 밀도 높은 감정을 표현하며 극을 끌고 간다. 깨끗한 그의 음색은 소년다움을 간직한 얼굴과 어우러져 학자로서 정열에 사로잡힌 지킬을 완성하고, 하이드를 연기할 땐 한층 중후한 말투와 목을 긁는 소리로 잔혹한 성정을 드러낸다. 두 캐릭터 간 낙차는 극 후반부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지킬의 사투를 더욱 애처롭게 보여준다. 하이드가 처음 등장하는 노래 ‘얼라이브’(Alive)는 이 작품 메가 히트곡인 ‘지금 이 순간’과 ‘대결’만큼이나 압도적이다.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들짐승 같은 숨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우렁찬 음성으로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17년 노하우가 쌓인 프로덕션은 안정적이고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인다. 조정은은 많지 않은 분량에도 엠마의 기품과 애절함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루시 역 아이비는 화려한 댄스쇼와 외로움에 사무친 노래를 두루 섭렵하며 눈과 귀를 책임진다. 다만 두 여성 캐릭터를 지킬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도구로만 사용했다는 지적은 여전히 피할 수 없을 듯하다. 특히 환락가에서 학대당하던 루시를 도우려던 지킬에게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충고하던 변호사 어터슨이 훗날 새 인생을 꿈꾸는 루시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장면에선 헛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공연은 서울 잠실동 샤롯데씨어터에서 내년 5월8일까지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