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피아노와 젊은 조율사…“재밌어서 해요”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5-31 1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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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아모르파티부터 클래식 베토벤 월광까지. 누구나 장르 상관없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에서 40m 떨어진 길거리에 놓인 홍익문고 앞 피아노. 2014년 5월쯤 처음 설치돼 이제는 신촌 명물 중 하나로 꼽힌다.

길거리 피아노와 젊은 조율사…“재밌어서 해요” [쿠키인터뷰]
2015년부터 신촌 피아노를 도맡아 관리한 김정인(28)씨.   

9년 전 설치된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피아노를 관리하는 이는 청년 조율사 김정인(28)씨 한 명뿐이다. 2010년 조율을 배우기 시작해 2015년부터 신촌 피아노를 도맡아 관리한 그를 30일 오전 서울 창천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2015년 2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김씨는 신촌 길거리에 피아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그는 “피아노를 가져다 놓은 홍익문고 사장님께서 사비로 조율사를 한 달에 한 번 부른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연주하는 사람이 많아 이 정도 주기로는 기본적인 관리도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신촌 피아노는 끊어진 현이 10개, 소리 나지 않는 건반이 4개나 됐다. “피아노 상태를 살펴보는 동안 관리에 적합한 사람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어요.”라며 김씨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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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문고 앞 신촌 피아노에 앉은 김정인씨.   

새 피아노로 세 차례 교체 되는 동안 김정인씨는 대학에 진학했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결혼을 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청년이 전업 피아노 조율사로 진로를 정하는 등 삶의 중요한 선택도 있었다.

그에게 신촌 피아노는 어떤 의미일까. 이를 묻자 그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의미는 없어요. 단순히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김씨는 이어 “그래도 하나 말해보자면 제가 관리하는 이 피아노가 시간이 흐르며 신촌 명물로 얘기된다는 점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도움 된다는 게 보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관리 자체가 재밌는 작업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예요.”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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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씨가 신촌 피아노에 앉아 조정작업을 하고 있다.   

재미로 한다는 그는 많은 시간을 신촌 피아노에 들인다. 3일에 한 번은 현이 끊어진 것과 같은 자잘한 고장을 고친다. 또 음의 정확한 음정을 찾는 조율은 한 달에 한 번, 건반을 바꾸고 줄과 해머 등을 바꾸는 대작업인 조정은 두 달에 한 번씩 한다. 기본적인 정비는 보통 30분쯤 걸리지만 조정을 할 때면 3, 4일 연속으로 들려 하루 3~4시간씩 작업한다. 신촌 피아노는 유동 인구가 많은 길거리에 놓여있어 정비 역시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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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비소식에 비닐이 씌어져 있는 신촌 피아노.   

피아노 전체에 비닐을 씌워도 비에 취약하다는 점 역시 문제다. 2020년에는 비에 젖은 건반이 갈라지고 찌그러져 수리로는 복구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자기 돈으로 피아노를 구입했다. “비에 젖었다 마른 건반은 뒤틀리기도 하는데 이러면 건반끼리 맞닿아 소리가 안 나거나 원래 음과 다른 소리가 나요”라며 “심하지 않으면 건반을 깎아 재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렇게 해도 정상적인 연주가 어려울 듯 했어요”라고 그가 설명했다.

피아노 조율은 연주자에 맞춰 달라져야 해 더욱 까다롭다. 건반을 치는 방식 같은 연주 기법 등에 따라 소리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들과의 작업에서는 음색의 밝기나 밸런스, 건반의 무게 혹은 음악적인 뉘앙스까지 소통하며 작업해요.”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이어 “신촌 피아노는 제 취향대로 작업하면 돼서 독특한 재미가 있어요. 보통 지나가는 사람에게 연주를 부탁하고는 멀리서 들어가며 좋아하는 방향으로 균형을 맞춰가요.”라고 덧붙였다.

야외에 놓여있다는 점을 고려해 조율하는 부분도 있다. 공명이 없고 주변이 시끄럽기에 최대한 크고 명확한 음색을 유지하게끔 한다.

2014년에도, 2023년에도 신촌역 근처에는 피아노가 있다. 그러나 2024년에도 피아노가 지금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기후 변화로 습도가 높아지고 비도 더 자주 오기 때문이다. 김씨는 “침수 앞에는 장사가 없는 듯해요”라고 토로했다.

수리가 어려운 피아노를 개인 돈으로 교체해 유지하는 것도 지속하기 힘들다. 한 번 피아노를 교체할 때 110만원 정도 든다. 새 피아노 값과 이를 신촌까지 가져오는 운반비, 기존 피아노를 폐기하는 비용도 필요해서다. 이전에는 기증을 몇 번 받았지만 어쿠스틱 피아노를 사용하는 사람이 줄어 이제는 문의도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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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씨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럼에도 김정인씨는 “신촌 피아노 관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이어 나갈 거예요”라고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피아노를 좋아해 석촌호수 등 길거리에 설치된 피아노를 탐방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이 신촌 피아노가 가장 관리가 잘 된다고 얘기할 때면 보람을 느껴요”라고 덧붙였다.

신촌 피아노를 치거나 연주를 즐기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신촌 피아노는 지나가는 모든 분을 위한 거예요”라며 입을 열었다. 이어 “관심 가져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다들 아끼고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신촌에 자주 놀러 와 피아노도 들리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셨으면 합니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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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온다 리쿠는 책 ‘꿀벌과 천둥’에서 귀를 기울이면 거기에는 언제나 음악이 가득하다고 적었다. 젊은 조율사로부터 음악은 이미 시작했다.

글⋅사진=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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