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클래식 창세기 쓴 '동양의 모차르트' [쿠키칼럼]

윤한결 등 국제콩쿠르 휩쓰는 청년 음악가들...그 뿌리는
“전쟁터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 피아니스트 한동일

기사승인 2023-08-17 06: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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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칼럼-이희용]

요즘 유럽의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한국인이 수상자 명단에 없는 국제콩쿠르를 찾아보기 어렵다. 올 6월 김태한(바리톤)과 김계희(바이올리니스트)·이영은(첼리스트)·손지훈(테너)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와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우승 트로피를 연거푸 거머쥔 데 이어 지난 7일에는 윤한결이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임윤찬(피아니스트)이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고, 양인모(바이올리니스트)와 최하영(첼리스트)은 각각 시벨리우스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고 영예를 안았다. 유럽 각국에서는 ‘클래식 한류’의 비결을 분석하는 방송 다큐멘터리와 신문 기획기사 등을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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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클래식 원조 음악가 피아니스트 한동일(사진 왼쪽 중앙)이 출연한 2022년 말 '마스터즈 시리즈' 포스터.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출연했다. 그는 아직도 서해 섬 등을 방문하여 클래식 음악을 연주⋅지도한다. 

반세기 전인 1974년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공동 2위에 오르자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축하 카퍼레이드를 벌인 일을 떠올리면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 것만큼이나 극적인 변화다.

정명훈 이전에도 1965년과 1967년 레번트릿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한 한동일(피아니스트)과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 1971년 나움부르크 콩쿠르 1위에 빛나는 백건우(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이들 1세대 클래식 월드스타 가운데 정경화는 정명화·정명훈과 함께 ‘정트리오’의 일원으로, 백건우는 인기 영화배우 윤정희의 남편으로 클래식 문외한에게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 국제음악콩쿠르 우승 행진의 서막을 장식하며 K클래식 창세기를 쓴 한동일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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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이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한동일은 1941년 12월 4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교회 찬양대 지휘자이자 한국 최초의 팀파니스트인 아버지 한인환의 영향으로 세 살 때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해방 후 소련군이 들이닥쳐 온갖 세간살이와 피아노마저 빼앗아가자 1946년 한인환은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월남해 서울관현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 전신) 창단 멤버가 됐다.

한동일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이화여대 김성복 교수 등의 집을 드나들며 무료로 피아노를 배웠다. 집에 피아노도 없어 틈날 때마다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주둔하던 미국 제5공군사령부 강당에서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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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BS TV '에드 설리번 쇼'의 인기 진행자 에드 설리번이 한동일을 인터뷰 하는 장면.

5공군사령관 새뮤얼 앤더슨 중장도 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1953년 10월, 사령부 강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한동일의 연주를 듣자마자 미국 유학을 돕고 나섰다.

한동일은 11월과 12월 전국의 미 공군기지 24곳을 돌며 유학비용 모금을 위한 연주회를 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일본 기지까지 순회했다. 연주가 끝나면 객석 사이로 모자가 돌았고, 장병들이 넣은 1달러짜리 지폐로 금세 수북해졌다. 당시로서는 꽤 큰돈인 4,350달러가 모였다.

명문 줄리아드 음악학교도 “전쟁터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라며 장학금 지급을 약속했다. 1954년 6월 1일 귀임하는 앤더슨 장군의 프로펠러 군용기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줄리아드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어머니 친구 김자경의 뉴욕 집에 얹혀살며 초·중등학교와 줄리아드 예비코스를 함께 다녔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여 만인 7월 25일, 한동일은 이른바 ‘전국구 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최고 인기의 버라이어티쇼 CBS TV ‘에드 설리번쇼’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한 것이다.

설리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온 피아노 신동‘으로 소개했다. 시청자들은 어린 나이에 겪은 인생 역정에 감동하고, 신들린 듯한 연주 솜씨에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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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왼쪽)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운데)가 한동일을 1958년 경무대로 불러 격려하고 있다. 

195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등 지역 교향악단들과 협연하고 1956년 4월에는 유서 깊은 카네기홀에서 뉴욕필하모닉과 함께 무대를 꾸몄다. 이 역시 한국인으론 처음이었다.

1958년 6월에는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로 불러 장학금을 주며 격려했다. 1962년에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등과 더불어 존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마침내 1965년 10월 27일, 카네기홀에서 열린 레번트릿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장 레너드 번스타인은 ”동양에서 온 모차르트“라고 극찬하며 우승 트로피를 건넸다.

그가 펼쳐온 한국인 최초 기록 행진의 정점이었다. 이후 뉴욕,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들이 앞다퉈 협연을 요청했다. 유명 음반사들의 녹음 제안도 잇따랐다. 1년에 70회가 넘는 연주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예술가가 아니라 한낱 ’연주 장사꾼‘이나 ’연주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다행히 1969년 인디애나대 교수로 부임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일리노이대, 노스텍사스주립대, 보스턴음대를 옮겨 다니며 후진 양성과 연주를 병행했다.

2004년 6월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도미(渡美) 5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김성복의 아들 이대욱이 지휘봉을 휘두르면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91세 아버지가 팀파니를 쳤다.

이를 계기로 한동일은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2005년 울산대 음대 교수로 부임한 데 이어 순천대 석좌교수와 일본 히로시마의 엘리자베스 음대 초빙교수를 지냈다. 2019년에는 한국 국적도 회복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한동일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 나선다. 지난해에도 인천 섬마을 중학교를 찾아 연주를 들려주고 피아노를 기증하는가 하면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다.

K클래식 원조 월드스타의 전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동포다문화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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