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이미 2017년에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 개발에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어 한국이 미국의 확장억제에 계속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핵 태세를 유지하는 데 있어 ‘단일 권한(Sole Authority)’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미국의 핵무기가 어떤 곳에 있든 핵무기 사용 명령을 내릴 최종 권한은 미국의 최고사령관, 즉 대통령에게 있다는 이 원칙에 기반해 미국은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할 경우 어떠한 핵무기로 북한에게 어떻게 보복할 것인지 한국과 구체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미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핵 사용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핵을 사용했을 때의 미 대통령의 판단과 결심에 전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4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고, 대통령은 ‘변덕스러운 대중여론의 압박’에 취약하기 때문에 국민 여론이 미국의 전쟁 개입에 부정적이거나 동맹의 가치보다 미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더 중시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 대통령이 북한과의 핵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을 지켜주려 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수년간 미국 국민 대상 여론조사결과에 의하면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이 한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응답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2023년 10월, 미 외교전문 싱크탱크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의 발표에 따르면 같은 해 9월 미 성인 3242명을 조사한 결과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이 한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응답은 50%였다.
2021년 같은 조사에서는 63%였고, 2022년에는 55%였는데, 2023년에는 50%로 다시 줄어든 것이다.
2023년 조사에서 집권 민주당 지지층 57%는 미군의 한국 방어를 지지한 반면, 공화당 지지층의 53%는 미군의 한국 방어를 반대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부상과 함께 ‘고립주의’, ‘미국우선주의’ 흐름이 확산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미국 내 분위기가 약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해 대선에서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재선된다면 미국의 한국 보호 의지를 신뢰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이 같은 결과와 관련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는 “미국의 동맹국 방어에 대한 당파적 분열이 커지고 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라며 “공화당원들은 (중남미) 불법 이민자를 막는 데 미군을 활용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고 분석했다.
공화당원들의 입장처럼 트럼프는 2019년 2월에 국방부 예산을 국경장벽 예산으로 전용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후 국방부의 건설과 마약단속 프로그램 예산을 국경장벽 건설 자금으로 용도를 전환했다.
2023년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핵 및 전략 기획을 토의하기 위한 ‘핵협의그룹(NCG, Nuclear Consultative Group)’ 신설과 한국의 자체 핵무장 옵션 포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워싱턴선언’을 발표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기존의 한미 국방‧외교차관급 2+2협의체인 한미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와의 차별성에 대해선 “EDSCG가 광범위한 정책을 협의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면, NCG는 핵운용에 특화된 협의체”라고 설명했다.
한미 정상은 “미국은 향후 예정된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을 통해 증명되듯,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운용하는 전략핵잠수함(SSBN)에는 사거리 1만2000㎞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트라이던트-Ⅱ’가 20발 실려 있고, 각 미사일엔 핵탄두가 8기씩 탑재돼 있다.
따라서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은 북한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워싱턴선언은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간의 합의문이기 때문에 만약 미국에서 대통령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휴지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조약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쉽게 폐기할 수 없는 반면 ‘선언’은 그런 법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 증진이 과연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한국 국민들의 안보 불안감을 지속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23년에 한미의 확장억제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워싱턴선언’의 발표가 있었지만, 한국 국민들의 안보 불안감과 자체 핵보유 열망은 결코 현저하게 약화되지 않았다.
2023년 1월에 최종현학술원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 국민의 76.6%가 독자적인 핵 개발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2024년 1월에 최종현학술원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72.8%의 한국 국민이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작년에 비해 약 4% 정도 낮아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워싱턴선언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될수록 미국의 확장억제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미국 본토 방어를 담당하는 글렌 밴허크 미군 북부사령부 사령관은 2023년 3월 의회 증언에서 “미국 본토에 대한 제한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공격에 대해 방어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한다. 우리가 목도한 북한의 역량과 능력이 제한된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마이크 터너 미국 하원 정보위원장(공화·오하이오)은 2023년 6월 4일 ABC방송에 출연해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이라고 믿느냐”는 질문에 “저희는 그렇게 믿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북한은 핵무기 능력, 미국을 타격하고 뉴욕시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핵)무기가 있고 그들도 (핵)무기가 있다. 북한과 관련한 억제력 개념은 죽었다”고 말했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의 확장억제 정책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될 것이다.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국방부장관이 될 것으로 유력시되는 크리스토퍼 밀러 전 미 국방장관 대행은 2024년 3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여전히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지 솔직하게 얘기할 때가 됐다.”라고 지적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밀러는 “한국과 일본 등은 엄청난 군사적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확장억제에서도 미국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지원하는 역할이어야 한다. 미국이 동맹에게 제공해야 할 핵심적인 도구는 정보력과 외교력이다.”라고 지적함으로써 확장억제에서 미국이 ‘주도’ 역할 대신 ‘지원’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확장억제에서도 지원 역할로 물러선다면 바이든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간의 ‘워싱턴선언’은 순식간에 휴지장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 동시에 여러 개의 전장(戰場)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과 미국에게 북한 견제보다는 중국 견제가 우선순위가 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이 미국의 확장억제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냉전 종식 직후에 수립된 미국의 2개 전쟁 동시수행전략은 2012년에 폐기되었고, 이후 하나의 전쟁만 수행하면서 다른 전쟁은 억제한다는 원플러스 전략이 채택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글로벌 차원에서 4개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첫째는 유럽 전선, 둘째는 중동 전선, 셋째는 대만 해협 전선이고, 넷째는 한반도 전선. 미국이 이 네 개의 전선을 동시에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특히 대만 해협 전선에서 미·중 간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한반도 전선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동원해 무력도발을 한다면 미국의 대응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 엘브리지 콜비 전 미 국방부 전략·전력 개발 부차관보는 2024년 5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자국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주된, 압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 싸우면서 중국과도 싸울 준비가 된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콜비는 또한 “난 미국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나 다른 데서 상당한 병력을 북한과 싸우기 위해 배치하고 투입하는 게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비용과 소모, 거기에 매몰되는 인력과 자산과 탄약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미군이 대만을 방어할 역량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이든은 의회에서 추가 안보 예산안을 통과시킬 때도 너무 큰 저항에 직면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가 북한이 한 짓 때문에 미국 도시 여러 개를 잃을 것이라고 보는가?”라고 질문했다.
북한의 노골적인 핵위협에 미국 대통령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미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방위 공약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미 육군에서 20년 근무했던 군사전략 전문가 에이드리언 루이스 캔자스대·해군참모대 교수는 2023년 한국의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한국은 독자적인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핵 개발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방위 공약은 견고하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를 보라. 그것(미국의 방어 공약)은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미국은 10년 가까이 지속된 베트남전에서 5만8000여 명의 미군 희생자를 내고 2000억 달러를 쓴 뒤 베트남을 포기했었다. 또 최근엔 아프가니스탄에 1조 달러를 투자하고도 (허무하게) 아프가니스탄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린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에 방위를 대가로 수많은 ‘청구서’를 들이밀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김정은과 평화 협약을 맺으려고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방위 공약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킬 것이라고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한국의 안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