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권고사직 통보하는 나라…‘빈곤화’ 위험 노출

다수 OECD 회원국, 상병수당 제도 등으로 소득 상실 위험 보호

기사승인 2019-05-10 0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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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험설계사(특수고용직)로 2년 정도 일하던 A씨는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면서 계약한 수준의 실적을 쌓을 수 없자 재계약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험설계사의 경우 계약 시점에서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수준의 실적을 쌓지 못할 경우 계약이 해지되는 조건으로 고용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하고,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옮겨 전세자금으로 생활비를 하다가 최근 기초 생계급여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

#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회사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된 B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 관리자가 병원을 방문해 복직 가능한 시점을 확인했다. 대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퇴사 권고를 받았고 스스로 일을 그만뒀다. 건강이 회복돼 비슷한 일을 하는 업체에 재입사했는데, 경력을 인정받았지만 기존 일자리에서 받은 임금의 80% 정도 수준만 받게 됐다. 

# C씨가 다니던 회사에는 병가 제도가 없어 이용할 수 있는 다른 휴가들을 최대한 이용해 직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예전에는 병가라는 게 회사에 있었는데 없어졌다. 당장 가지고 있는 연차, 체력단련 휴가 등으로 한 달 정도 있어서 그걸로 대체했다. 다음에는 대체할 게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고 토로했다.

이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하 보사연)이 질병 발생 이후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2018년 6월 1일부터 9월 22일까지 수도권과 대전/세종 지역에서 진행한 심층면담 내용 일부이다. 보사연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 ‘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와 정책과제(연구책임자 김수진)’를 8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 대부분은 질병이 발생할 경우 실직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료패널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중증질환 발생 시 개인의 연간 소득은 36.1% 감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증질환이 발생한 해 중증질환군에서 경제활동 참여율도 비중증질환군에 비해 감소했다. 

아프면 권고사직 통보하는 나라…‘빈곤화’ 위험 노출

재취업을 하더라도 그 전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증질환을 진단받은 적이 없는 경우 개인소득은 9년에 걸쳐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중증질환군은 중증질환을 진단받은 해 비중증질환군에 비해 개인소득이 감소했다. 그 다음해에도 중증질환을 진단받기 전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들의 근로소득의 빈곤화 정도를 평가한 결과, 중위소득 50%를 빈곤선으로 했을 때 중증질환을 경험하지 않은 집단에서 빈곤율은 완만하게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가구주가 중증질환을 경험한 경우 진단 시점에 가구근로소득의 빈곤 정도는 소폭 증가하했다. 진단 2년 차와 3년 차에 빈곤율은 더 증가했다.

업무 외 이유로 질병을 경험한 노동자들에 대한 심층면접을 진행한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업무 외 상병으로 휴직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것이 확인됐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질병 발생 이후 바로 실직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 실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기 전에 불안정한 노동을 지속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실직 이후 재취업하지 못하고 실직상태가 지속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일자리로 진입 ▲질병에서 회복된 뒤 더 나쁜 비정규직으로 진입 ▲비정규직 노동자가 건강상의 문제로 실직한 뒤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직이 장기화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빈곤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상병 발생 시 휴직과 휴가가 보장된다고 간주되지만, 심층면접에 참여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장에서 업무 외 상병에 대한 휴직·휴가 제도는 제한적이었다. 정규직 노동자 7명이 일한 사업장 중 4곳 이 상병휴가·휴직 제도가 있었고 이 중 휴가·휴직 기간 중 급여가 지급되는 곳은 대기업 1곳이었다.

취업규칙 자료를 이용해 민간기업들의 업무 외 상병 관련 휴직 제도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업무 외 상병 관련 휴직 제도를 갖고 있는 사업장은 많았지만 유급 휴직이 가능한 경우는 6% 정도에 불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급휴직을 제공하는 비율은 사업장 규모별로 편차가 있었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에도 16~17% 수준에 불과했다.

급여 지급과 관계없이 휴직이 가능한 기간 또한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이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3개월 이상 휴직이 가능한 사업장은 100인 미만사업장의 경우 20~35% 수준이었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48~73% 수준이었다.

한국과 달리 대부분의 OECD 회원국들은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과 공적 영역에서 상병급여 제도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아픈 노동자를 실직과 소득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연구책임자인 김수진 보사연 부연구위원은 “OECD 34개 국가 중 29개 국가는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과 공적 상병수당 제도라는 두 가지 제도를 모두 이용하고 있다. 2개 국가는 공적 현금 지원 제도만을, 3개 국가는 업무 외 상병과 관련한 휴가/휴직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다”며 “두 가지 제도 중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질병으로 실직한 노동자는 다른 사회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질병 발생의 충격을 완화하는데, 주로 대출, 자산 처분 등 근로 외 소득을 통해 의료비와 생계비를 마련한다”며 “질병이 단기로 끝날 경우 재취업 등을 통해 부채를 갚을 수 있지만 질병이 장기화될 경우 만성적인 빈곤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질병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경제적 위험을 고려했을 때 아픈 노동자들을 실직과 소득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유수인 기자 suin92710@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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