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성애는 틀렸습니다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2-02-03 17: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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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성애는 틀렸습니다 [친절한 쿡기자]
KBS2 ‘신사와 아가씨’ 방송 캡처.

중학생 때 이야기입니다. 소위 ‘날라리’ 무리를 이끌던 여학생 중에 남학생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 머리를 두고 여러 풍문이 돌았습니다. 두발 단속을 피해 머리를 1㎝라도 기르려 애쓰던 때였으니, 그럴 수밖에요. 가장 널리 퍼진 소문은 그 애가 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을 잘렸다는 설이었습니다. 딸의 비행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홧김에 가위를 들었다고요.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지 몰라도, 당시에는 그 소문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십수 년 전 일이 다시 떠오른 건 지난달 30일 본 KBS2 ‘신사와 아가씨’ 때문입니다. 딸 박단단(이세희)이 이영국(지현우)과 사귄다는 사실을 안 박수철(이종원)은 벌컥 화를 냅니다. 나이 많고 자녀도 셋이나 둔 영국이 단단의 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수철은 영국 가족과 어울려 놀던 단단을 억지로 집에 데려오더니, 그를 방에 밀어 넣고 자물쇠로 문을 잠가 버립니다. 전업주부인 어머니에겐 ‘자물쇠를 풀어주면 집에서 내쫓을 것’이라고 으름장도 놓습니다.

가뜩이나 속 시끄러울 수철에겐 미안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삐빅! 그건 범죄입니다. 형법 제276조에 나온 감금죄 말입니다. 당신은 딸을 가두며 “그러게 왜 아빠 말을 안 들어!”라고 호통치셨죠. 하지만 아버지라는 지위가 딸의 신체 자유를 통제할 근거를 주진 못합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애 줄줄이 딸린 나이 많은 남자한테 딸을 보내?”라고도 하셨죠. 하지만 딸을 위한다는 마음이 딸의 기본권을 억압할 명분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딸의 의사에 반해서 그를 방에 가두는 행위는 범죄입니다. 그 부성애는 틀렸습니다. 그건 부성애가 아니라 ‘폭력’으로 호명돼야 마땅합니다.

그 부성애는 틀렸습니다 [친절한 쿡기자]
tvN ‘응답하라 1997’ 속 성시원(정은지)은 가수 토니안 집에서 밤을 새웠다가 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을 잘린다. 방송 캡처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정폭력이 면죄되는 광경은 TV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1월 방영된 KBS조이 ‘무엇이든 물어보살’을 볼까요. 아버지가 정한 통금시간을 어겼다가 삭발당한 딸의 사연이 등장하자, 진행자 겸 상담사인 서장훈과 이수근은 “그건 심했다”면서도 ‘아버지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니 네가 이해하라’는 식으로 조언했습니다. KBS2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속 고은숙(박준금)은 딸 민효원(이세영)이 가난한 청년 강태양(현우)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딸을 방에 가뒀습니다. tvN ‘응답하라 1988’에선 아버지가 학생운동에 가담하려는 딸을 집에 가두는 장면이, ‘응답하라 1997’에서는 외박한 딸의 머리카락을 아버지가 잘라버리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폭력으로 자녀를 통제하는 이 부모들은 대부분 애잔하거나 간혹 우스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자녀들이 느낄 분노와 공포, 무력감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너희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사랑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을 잘렸다던 쿡기자의 중학교 동창과 단단(신사와 아가씨), 보라(응답하라 1988), 시원(응답하라 1997), 효원(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그리고 폭력을 당하고도 제대로 사과받지 못해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있을 수많은 ‘유교걸’들의 안부가 궁금한 날입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