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하는 사이토 총독 처단 '금호문 의거' 송학선 열사 [근대뉴스]

[MZ세대를 위한 '현대문으로 읽는 근대뉴스' 해설]
안중근 의거 영향 받은 송학선 열사 사형 언도에 당당

기사승인 2022-09-14 11:17:33
- + 인쇄
1926년 11월 11일

(1926년) 5월 28일 오후 1시 20분 경성부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송학선(30·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에 대한 복심 공판이 지난 3일 경성복심법원 제3호 법정에서 진행됐다.

이날 스에히로 재판장은 피고 송학선을 불러 “피고는 대정15년 5월 28일에 금호문 앞에서 조문을 마치고 금호문으로부터 돌아가는 이토우를 찌르고 다카야마를 살해한 후 순사 두 명에게 또한 상해를 가하였으니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증거가 충분함으로 피고는 원심과 같이 사형에 처한다. 만약에 이에 불복하거든 5일 이내 상고하라”고 언도했다.

이에 피고 송학선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다만 고개만 끄덕하고 태연히 간수에게 호위되어 퇴정하였더라.

한편 이날 경성법원에서는 송학선 언도에 이어 학생만세사건의 피고 이병립 외 10명에 대한 언도가 있었다. 아침부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방청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개정 전에 이미 3호 법정 안은 미어터질 듯 사람들로 넘쳤고 경관들이 이를 밀어내느라 목청을 높였다.

대부분 피고 송학성 및 학생 가족이었다. (출전 조선일보)

조문하는 사이토 총독 처단 '금호문 의거' 송학선 열사 [근대뉴스]
순종 임금 조문을 위해 창덕궁에 들어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송학선 열사. 서울 북아현동에 살며 남대문로 일본인 상점에 고용되어 생활했다.
■ 해설

송학선(1893~1927)은 지금의 서울 북아현동 출신이다. 가난한 집안 아들로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09년 무렵 경성 남대문로에 있는 오쿠다농구회사 점원으로 일했다. 일인 고용주 밑에서 줄곧 일해온 송학선은 조선인 차별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을 접하고 사회적, 민족적 항일 의식을 갖게 됐다.

그는 자신도 안중근 의사와 같이 총독을 암살하기로 마음 먹고 1926년 3월 일하던 사진관에서 양식도(洋食刀)를 손에 넣고 사이토 총독 처단을 노렸다. 그해 4월 26일 순종 임금이 승하하자 사이토가 조문을 위해 4월 28일 창덕궁에 닿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송학선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 나가 기회를 노리다 오후 1시 30분쯤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서자 비호 같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이 칼에 경성부부회 평의원 다카야마 등을 처단했다.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송학선은 이들이 사이토 마코토 일행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거사 후 송학선은 재빨리 몸을 피해 휘문고보(현 창덕궁 옆 현대사옥) 쪽으로 달아났으나 조선인 순사 오환필 등이 추격해 오자 그를 찔러 상해를 입혔다.

체포 과정에서 휘문고보 학생들에게 "너희는 만세를 부르라"며 절규했다. 기마병사를 피해 휘문고보 교정과 학교 옆 골목 등으로 달아나며 경관 등에게 돌을 던지며 끝까지 저항하다 체포됐다. 이 의거는 6.10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1927년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한편 경성복심법원 사형 언도 판결 보도는 보도 통제로 기사가 일정 부분 삭제되어 백지로 발행됐다.

하지만 송학선 의거에 대한 흔적은 금호문 앞에 의거 터 비만 남아 있을 뿐 그의 고향 북아현동 집 터 등은 대규모 아파트 개발로 사라진지 오래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