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찾아 무대로 돌아온 두 ‘연기 고수’ [페니맨을 만나다]

기사승인 2023-03-22 06: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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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찾아 무대로 돌아온 두 ‘연기 고수’ [페니맨을 만나다]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페니맨을 연기하는 배우 송영규(왼쪽), 임철형. 쇼노트

사내는 악덕 사채업자다. 궁핍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이자를 높게 쳐서 자기 배를 불린다. 로즈 극장을 운영하는 필립 헨슬로도 그의 먹잇감 중 하나다. 대금을 치르기로 한 날 헨슬로가 빈손으로 나타나자 사내는 “코를 잘라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26일 막 내리는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 속 페니맨은 셰익스피어 5대 희극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의 악당 샤일록과 꼭 빼닮았다.

돈을 향한 페니맨의 집요함은 그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카리스마를 입을 때 더 섬뜩해진다. 콧수염으로 멋을 낸 채 잔뜩 거드름 피우는 주인공은 배우 송영규와 임철형. 디즈니+ ‘카지노’의 교활한 최칠구(송영규)나 MBC ‘닥터 로이어’ 속 비밀스러운 사형수 남혁철(임철형)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무대 위 페니맨을 보고 숨을 ‘헉’ 들이켰으리라. 악역 연기라면 남부럽지 않게 소화해낸 두 배우의 내공은 페니맨을 한층 표독스럽게 보여준다.

반전은 따로 있다. 사실 페니맨은 의외의 개그 캐릭터.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상상한 이 연극에서 페니맨은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에 푹 빠져 그의 ‘쩐주’가 된다. “이게 연습입니까?” 연극엔 도통 문외한인 페니맨이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을 처음 참관한 날,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얼이 빠진 페니맨의 모습에 객석에선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무대에서 매일 활력을 얻는다는 두 ‘연기 고수’를 지난 16·1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고향 찾아 무대로 돌아온 두 ‘연기 고수’ [페니맨을 만나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공연을 연습 중인 송영규. 쇼노트

“10년 만에 돌아온 무대, 고향 온 기분이에요”

10년. 송영규가 무대로 돌아오기까지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사이 관객 1600만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감독 이병헌)과 SBS 히트 드라마 ‘스토브리그’ ‘하이에나’ 등에 얼굴을 비쳤다. 송영규는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고향의 품에 들어온 기분이다. 안정적이고 치유 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드라마 ‘카지노’에서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살던 중년 사내는 뜻밖에도 사근사근했다. “첫 공연, 기억나요. 정신없이 공연했어요. 목 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웬걸요. 고시에 합격해서 고향에 돌아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주는 느낌이었어요. 행복했어요.”

“데뷔작이 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긴 세월 무대에 올랐던 그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덕분에 초심을 찾았다고 했다. 돈놀이에 인생을 허비하다가 비로소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페니맨을 통해서다. 셰익스피어의 글을 처음 접한 페니맨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동료들을 지키려 권력에 맞서기도 한다. “돈 때문에 남을 해치던 사람이 연극에 스며들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와 닮았어요. 저도 야생에서 무대로 돌아와 예술의 가치를 새삼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에게 공연은 “온전히 내 시간에 빠져서 동료들과 아름다운 호흡을 나누고 우리만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그 맛에 빠져 무대에 오르기를 십수 년. 출연한 뮤지컬만 50편에 달하고, 연극에도 10편 넘게 출연했다.

한때 생계 때문에 연기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던 청년은 이제 “후배들 술값으로만 수백만 원”을 쓸 정도로 든든한 선배가 됐다. 2021년부터는 세명대학교 연기예술학과 특임교수로 임용돼 교단에도 선다. 패기가 뜨거웠던 젊은 날이 생각나서일까. 그는 후배 배우들에게도 애정이 깊다. “네드 앨린 역을 맡은 한동훈이란 친구가 있어요. 연극만 한 배우인데, 태도가 바르고 열심히 해요. 얼마 전 JTBC ‘스카이캐슬’을 쓴 유현미 작가님이 공연을 보러 오셔서는 한동훈이 인상 깊었다기에 데리고 와서 인사시켰죠. 뿌듯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송영규의 얼굴에선 기쁨이 흘렀다. 그는 “연기는 나를 솔직하게 보는 데서 시작한다”며 “나를 높이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

고향 찾아 무대로 돌아온 두 ‘연기 고수’ [페니맨을 만나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연습 중인 임철형(왼쪽), 이상이. 쇼노트

“동네 아빠들, 페니맨에 공감 간대요”

송영규와 번갈아 페니맨을 연기하는 임철형도 공연이 오랜만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2015년부터 이듬해까지 공연한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를 끝으로 한동안 드라마와 영화에만 주로 출연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하는 듯한 각오”로 매체 연기에 집중하던 그는 페니맨의 매력에 빠져 연극 복귀를 결정했다. “페니맨은 고체 같은 인간이 액체화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악역처럼 등장했다가 연극과 사랑에 빠지며 순수함을 되찾고 행복해하죠.” 설령 조연이라 해도 그만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법. 셰익스피어를 만나 새 삶을 발견한 페니맨은 아빠들의 심금을 울렸다. 임철형은 “공연을 본 40·50대 동네 아빠들이 페니맨에게 무척 공감하더라”며 웃었다.

페니맨은 본 공연뿐 아니라 커튼콜에서도 신 스틸러다. 배우들이 차례로 춤을 추며 인사하는 커튼콜에서 페니맨은 이렇게 외친다. “잠깐! 그런 치명적인 약이 나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만투아의 법에 따르면…” 페니맨이 극중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약제사 역을 얻어 입술이 부르트도록 연습한 대사다. 임철형은 “원래는 페니맨도 춤을 추기로 했으나 김동연 연출이 제안해 대사하는 것으로 바꿨다”며 “‘여러분 그리고 우리들’이란 대사를 통해 공연을 찾아준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무대는 배우와 관객의 것”이라고 믿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임철형은 “관객이 킥킥대는 소리를 들으면 신이 난다”고 했다.

“아직도 ‘셰익스피어 인 러브’ 첫 공연이 잊히지 않아요. 자녀들도 보러 와서 더 떨었죠. 무대에 올라가 손을 뻗는데, 벌벌 떨리는 제 손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무대에서 느끼는 설렘, 동료들과의 교감, 팀워크…. 이 모든 것들이 제겐 소중해요.” 임철형은 공연을 마친 뒤 한동안 다시 매체 연기에 전념할 예정이다. 하지만 “일정이 정리되면 작품 규모에 상관없이 연극으로든 뮤지컬로든 다시 무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복귀 가능성을 남겼다. 그만큼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준 울림이 컸다고 한다. “아마 제작사(쇼노트)가 고민 많을 거예요. 재연이 올라오면 출연하겠다는 배우가 많을 것 같거든요. 하하하.” 쾌활하게 웃는 그에게서 연극에 심취한 페니맨의 설렘이 보였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