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이 나이스한 ‘더 글로리’로 깨달은 것들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3-25 06: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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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이 나이스한 ‘더 글로리’로 깨달은 것들 [쿠키인터뷰]
넷플릭스 ‘더 글로리’ 스틸컷.

2년 전 배우 정성일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인기 작가 김은숙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차기작을 집필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그가 출연한 tvN ‘비밀의 숲2’를 보고 캐릭터를 만들었단다. 알고만 있으라는 비밀스러운 말에 조용히 기다리기를 어언 1년. 어느 날, 기다리던 대본을 받은 그는 깜짝 놀랐다. 김 작가의 기존 작품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여서다. 대본은 눈 뗄 수 없는 재미로 가득했다. 그가 맡은 캐릭터는 학교 폭력 가해자의 남편이자 일명 ‘나이스한 XXX’. 그렇게 정성일은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하도영이 됐다.

24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성일은 하도영과 비슷한 듯 달랐다. 정중한 신사 같으면서도 이내 수줍게 미소 짓곤 했다. 늘 조용하고 잔잔하던 그는 ‘더 글로리’를 만나고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졌다. 길거리만 나가도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물론이요, 아들의 유치원 선생님이 사인을 요청할 정도다. 정성일은 “작품 인기는 예감했으나 자신이 주목받을 거라곤 예상 못 했다”고 털어놨다. 글이 재미있으니 영상물로 탄생하면 파급력은 자연히 커질 터였다. 캐릭터보다 이야기에 집중하며 하도영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했다.

하도영은 모호하다. 그는 어떤 의도도 없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몸에 밴 특권의식 때문이다. 나쁘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 ‘나이스한 XXX’를 표현하기 위해 정성일은 외국 작품 속 귀족을 참고했다. 자신의 매너가 타인에게 무시로 가닿는 미묘한 간극을 연구했다. 극 중 하도영이 최혜정(차주영)에게 명품 가방을 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자기 딴에는 신경 써서 준 거지만 혜정 입장에선 돈으로 모든 걸 하려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거죠. 그에겐 당연한 게 실은 당연하지 않으니까요.” 정성일은 하도영을 파헤치며 그가 거쳐 온 상황과 감정을 이해했다. 그는 하도영이 박연진(임지연)과 결혼한 이유와 하예솔(오지율)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를 차근히 설명했다.

정성일이 나이스한 ‘더 글로리’로 깨달은 것들 [쿠키인터뷰]
‘더 글로리’ 스틸컷.

“‘적게 입었는데 다 디올이어서’라는 대사가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적게 입었지만 천박해 보이지 않고, 재력을 자랑한 것도 아니어서라고 생각했어요. (박)연진이가 가진 ‘날티’도 알아봤을 거예요. 늘 계획대로 살아온 하도영에게 연진이는 적당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 거예요. 연진이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하도영은 결정에 책임을 지는 남자거든요. 그러나 연진이는 끝까지 자기 멋대로 굴어요. 하도영으로서는 예솔이만이라도 꼭 책임지고 싶던 거죠. 낳은 정보다 기른 정에 반응한 거예요. 하도영이 순탄하게 살던 만큼, 예솔이와 떠났어도 온전히 행복할 순 없을 거예요. 선택의 말로가 살인이라는, 최악의 나락으로 빠진 거니까.”

바둑은 극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하도영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성격을 추측케 하는 단서는 기풍이다. 서서히 상대를 옥죄는 문동은과 달리 하도영의 바둑은 고요한 듯 명확하게 결정타를 가한다. 극 말미 박연진에게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 역시 그렇다. 정성일은 오로지 이 대목을 위해 앞선 회차에서 의도적으로 하도영의 감정을 절제했다. 참고만 있던 그는 박연진이 수세에 몰려서도 자신을 떠보자 큰 소리로 분개한다. 하도영의 날 선 감정이 정성일에게 옮겨 붙은 순간도 여럿이다. 동은 집을 찾아간 연진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는 장면을 연기할 땐 순간적으로 화가 났단다. 개성 강한 캐릭터와 배우 사이 호흡이 메서드 연기로 이어진 셈이다.

“(임)지연씨에게 ‘이 장면은 정말 짜증 난다’며 분통을 터뜨린 적이 몇 번 있어요. 연기를 뻔뻔할 정도로 살벌하게 잘해요. 송혜교씨도 멋졌어요. 성인 동은이가 등장하는 대목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파트 2에서 어머니와 대립하는 장면도 좋았고요. 대학로에서부터 절친하던 동료 배우 박성훈(전재준), 김히어라(이사라)와도 좋은 호흡을 나눴어요. 차주영씨는 생각 이상의 에너지를 줬습니다. 이도현은 좋은 친구이자 정말 밝은 사람이고요. 배우들과 친해지고 의지하며 제 감정도 바뀌더라고요. 우리가 나눈 실생활 속 적당한 친분이 드라마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졌어요.”

정성일이 나이스한 ‘더 글로리’로 깨달은 것들 [쿠키인터뷰]
배우 정성일. 넷플릭스

모든 일을 마친 하도영이 홀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는 장면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동은이를 이해하며 동시에 해보지 않은 걸 시작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생각했어요. 박연진과는 완전히 연을 끊어요. 하도영은 선택에 이르는 과정이 복잡할 뿐이지, 결정 후에는 후회하지 않거든요.” 하도영은 박연진과 문동은 사이에서 위험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정성일은 하도영의 감정선을 두고 말했다. “하도영은 연진이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거예요. 다만 동은과는 호기심, 설렘, 숨 막히는 감정이 동반한 관계예요. 지극히 제 기준으로는… 사랑이죠. 물론, 부적절한 관계지만요.”

파트 1 성공 후 김 작가는 정성일에게 “양조위 같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제 하도영 같은 캐릭터를 많이 제안받을 거야. 그럼에도 하도영과 같은 결을 가진 인물은 없을 거야. 변화를 줄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잘 선택해야 해.” 그의 말처럼, 오랜 무명 기간을 거친 정성일에게 요즘은 특별한 나날의 연속이다. ‘더 글로리’ 이후 전 세계서 큰 관심을 얻고 있다. 인기를 실감하냐고 묻자 정성일은 “그렇다”고 인정하면서도 명쾌하게 덧붙였다.

“작품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마구 들뜰 나이도 아니고요. 해왔던 것처럼 하겠습니다. 흐름 따라 천천히, 신중하게 나아가려 해요. 매체 연기 매력은 여전히 알아가는 단계예요. 처음엔 무대와 호흡이 달라 혼란스러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력이 보이더라고요. 물론 지금도 연기를 가장 많이 배우는 곳은 연극 무대예요. 무대는 제가 도태되지 않게 해요. 잊고 있던 걸 상기하게 만들어요. 요즘 연출가와 관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배워요. 덕분에 하도영도 연기할 수 있던 거죠. 나중에는 ‘저 배우 연기 정말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것만으로도 배우로서 성공한 인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한 마디를 위해 계속 공부해야죠, 앞으로도.”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