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삶는 남자, 마음의 도보 여행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26)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고귀한 순간

기사승인 2023-05-06 06:35:01
- + 인쇄
어제 온종일 비가 오더니 밤사이에 그쳤다. 비 온 후라 하늘도 맑고 공기도 신선하다. 봄기운이 완연하여 몸에 닿는 공기 느낌도 좋고 햇볕도 따끈따끈하니 좋다. 집 주변 숲에서는 새들 소리가 요란하다.

뭐라 재잘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살짝 들떠서 떠드는 소리처럼 들린다. 한동안 황사로 하늘이 찌뿌듯했는데 오랜만에 투명한 하늘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나물 삶는 남자, 마음의 도보 여행
아내가 나물을 찌기 전에 굵은 가지 등을 걸러내고 있다. 곤드레는 고려엉겅퀴의 강원도 사투리로 파종 후 생장이 빠르고, 은은한 향취가 있어 예로부터 구황작물로 많이 쓰였다. 사진=임송

오늘은 아내와 둘이 온종일 나물 작업을 했다. 다음 주에 5월분 학교급식 물량을 내보내야 하는데 재고가 부족하다기에 부랴부랴 주말 작업을 했다.

휴일에 직원들 없이 아내와 둘이 작업하면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여유가 있어서 좋다. 일하다가 힘들면 쉬었다 하기도 하고, 배고프면 뭘 좀 먹고 와서 해도 되니 시간이 자유로워서 좋고 아내와 같이 일하면 말없이도 손발이 척척 맞으니 서로 편하다.

밥솥에 쌀을 안치고 넣기만 하면 곤드레밥, 취나물밥 등이 되는 소위 '밥짓기용 나물' 제품은 5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강원도 평창에 곤드레나물밥을 간편하게 만드는 제품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와는 제조 공법 등이 달랐고 특히 곤드레 뿐만 아니라 취나물, 무청 시래기, 버섯 등으로까지 다양화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다. 지금은 유사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제법 많이 생겨났다.

나물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재료다. 그 번잡한 과정을 우리가 대신해주자는 것이 제품 개발의 착안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물건 만드는 과정에 손 가는 일이 많다.

게다가 공정마다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겉으로는 작업이 단순해 보여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일들이 제법 많다.

예를 들면 같은 취나물이라도 그때그때의 물성(나물의 뻣뻣한 정도)에 따라 찌는 시간을 조정한다. 간혹 시간 조절에 실패하여 나물이 살짝 무르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는 쓴 물을 우려내는 과정에서 투입하는 찬물의 양을 많이 한다거나 평소보다 나물을 자주 뒤집어 준다. 그래도 무른 것이 괜찮아지지 않으면 건조할 때 나물끼리 뭉치지 않게 잘 펴서 말려야 한다.
나물 삶는 남자, 마음의 도보 여행
증숙기에서 곤드레나물을 꺼내고 있다. 채반에 나물을 그득 담으면 무게가 상당하다. 증숙기에 나물을 넣고 꺼내는 작업은 주로 내가 한다. 사진=임송

전날 물에 담가놨던 나물을 채반에 담아 차곡차곡 찜기에 넣고 스팀 가열을 시작하면 약 1시간 남짓 짬이 난다. 작업하느라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하고 의자에 앉는 이 시간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주로 전면으로 보이는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한가하게 앉아있는 게 다지만, 소란스러운 일과 일의 틈바구니에서 찾아낸 이 잠깐의 시간이 나에겐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한가하게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1시간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데, 오늘은 프랑스 여행가가 튀르키예에서 느꼈다는 마법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60이 넘은 나이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수십만 km를 도보로 여행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나는 걷는다’라는 세 권짜리 두툼한 여행기를 썼는데 2권 초반부에 자기가 왜 그 목숨을 건 긴 여행을 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빗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코에서 무릎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면서 내가 왜 이 여행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다. (중략) 자 이제 분발해서 이 비상식적인 도보여행이 가져다줄 행복만을 맛볼 수 있도록 현재 나를 짓누르는 이 어려움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아야 한다. 작년에 튀르키예에서는 바로 이 마법 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나물 삶는 남자, 마음의 도보 여행

“이 부서지기 쉬운 순간은 나와 세상이 화합하는 시간으로, (중략)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때에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은 찌르레기의 비행처럼 덧없고 강렬한 순간이며,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바로 이 행복을 찾아서 떠난 것이다.”(베르나르 올리비에 저, 고정아 역, 나는 걷는다, 2권에서 발췌)

저자가 튀르키예에서 맞닥뜨렸다는 '마법 같은 순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대체 그것이 무엇이관데 60이 넘은 사람을 죽음을 무릅쓴 여행으로 이끌었을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웬만한 어려움쯤은 쉽게 극복할 수 있게 하고, 슬플 때 위로가 되며, 나와 세상이 화합하는 시간이고,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고귀한 순간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