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에서 떠드는 자녀를 방치한 남자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28)
“사람은 원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

기사승인 2023-05-30 15: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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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특정 사실을 놓고 집안 식구들 간에 의견이 갈린 적이 있다. 우리 집에 방문했던 사람의 행동거지에 대해 한편에서는 주눅 들지 않고 쾌활해서 좋다고 하고 다른 한편은 사람 대하는 데 조심성이 없어서 싫다고 했다.

살다 보면, 이런 의견 차이를 가끔 겪는다. 그럴 때 어느 한 편은 상대방이 고지식하게 편견에 휩싸여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고 답답해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도, 그쪽 나름의 의견이 있고 역시 답답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사람이 모든 사안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이런 견해차가 왜 생기겠나. 각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처지에서 편한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겠나.

많은 심리 실험이나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사람은 원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라는 점을 지적해왔다.

최근에 책 내용을 손으로 옮겨적는 필사에 재미를 붙여 ‘니체의 말’이라는 책을 옮겨 적고 있다. 시라토리 하루히코라는 일본 사람이 니체의 저작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발췌, 편집한 책이다. 한 주제 당 대략 반 페이지 내외 분량으로 편집되어 있어서 필사하기 딱 좋다. 아래는 최근에 필사한 내용이다.

“대부분 사람은 사물이나 상황 그 자체를 보지 않는다. 그것에 사로잡힌 자기 생각이나 집착, 고집,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정 또는 머릿속에 멋대로 떠올린 상상을 본다. 결국 자신을 이용하여 사물이나 상황 자체를 감추고 있다.”(92쪽)

일본어를 번역한 것이라 말이 매끄럽지 않지만, 사람은 사물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본다는 취지다.

햇수를 세어보니 대략 30년 전에 읽었던 내용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남자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아이들은 지하철 안을 뛰어다니며 다른 승객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소란을 피웠다. 그 지하철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남자가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다못한 한 승객이 그 남자에게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어 주변 승객들이 불편해하니 아이들을 챙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처 아이들을 챙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조금 전 병원에서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는 중이라 경황이 없어 아이들을 챙기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만약 자신이 좀 더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면, 그 남자에게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소란 피우는 아이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남자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섣불리 단정하지도 않았을 거라면서 그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어쩌면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막을 여행하는 목마른 여행자에게 보이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만년필 하나가 놓여있다. 내가 한 방향에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에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만년필을 보는 경험은 할 수가 없다. 또한 내가 그 만년필을 손에 쥐어본다면 손에 닿는 부분의 느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쥐어보지 않은 부분에 대한 촉감은 경험할 수 없다.
지하철 안에서 떠드는 자녀를 방치한 남자
최명희의 혼불을 필사하는 모습. 혼불문학관(전북 남원시 사매면 소재)에는 작가 최명희가 지인에게 쓴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그 단정한 글씨 모습에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필사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다. 사진=임송

그러니 내가 경험한 만년필은 ‘나’라는 존재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부분”을 “보거나 만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년필을 만져 본 경험에 의하면….”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보통은 만년필을 몇 번 사용해 보면 그것에 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부분적인 경험이나 설명을 통해 전체를 추론하거나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추론이나 상상이지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깊은 산 속에서 청량한 약수를 먹고 그 물맛을 친구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자.

내 설명을 통해 친구가 그 청량한 물맛을 알 수 있을까. 아마 내가 물맛이 청량하다고 말하면 그 친구는 이전에 자기가 경험했던 청량한 물맛을 상상하며 그런 맛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청량하다고 말하는 물맛과 친구가 청량하다고 기억하는 물맛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니 말이나 글로 의미를 전달하거나 습득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가. 어쩌면 핵심적인 내용은 전달하지도 못하고 잡다한 주변 정보 따위만을 늘어놓음으로써, 오히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만을 초래할 수도 있다.

소위 “의견 대립”이라고 하는 많은 경우가 사실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부분적인 경험을 전체로,” “추론이나 상상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정 분야에 정통한 소위 ‘선수’들끼리 만나 의견을 나눈다면,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나. 서로 눈빛 교환하고 말 몇 마디 주고받으면 그만이지.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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