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힘든 일은 남자가, 여자는 외모 치장만?”…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편견 여전

기사승인 2016-07-05 20: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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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김모(33·여)씨. 어린이 애니메이션에서 왕자가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장면을 보며 딸(4)에게 물었다. “외국 애니메이션 ‘마이리틀포니’의 ‘레인보우 대시’나 ‘애플잭’이었다면 스스로 탑을 빠져나왔겠지?” 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둘 다 남자잖아” 

김씨는 깜짝 놀랐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레인보우 대시와 사과농장을 운영하며 육체노동을 하는 애플잭을 딸은 남성 캐릭터로 오인하고 있던 것이다. 이후 김씨는 딸에게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는 애니메이션의 시청을 중단시켰다.

김씨가 이 같은 사례를 SNS에 올리자 애니메이션 속 성편견에 공감하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에게 성편견을 조장하고 고정적인 성역할을 학습 시킨다는 것이다.

캐릭터 성비 4:1…갈등 해결 주체도 대부분 남성 

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편견 사례는 주요 캐릭터 성비와 색상, 역할 중요도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주요 캐릭터의 성비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국산 애니메이션 ‘로보카 폴리’, ‘꼬마버스 타요’, ‘출동! 슈퍼윙스’ 등의 주요 캐릭터는 거의 남성이다. 주요 등장인물 5명 중 여성 캐릭터는 1명꼴이다.

캐릭터 색상 역시 여성의 경우 ‘분홍’을, 남성은 ‘파랑’을 주로 사용했다. 로보카 폴리의 ‘엠버’, 출동! 슈퍼윙스의 ‘아리’, ‘뽀롱뽀롱 뽀로로’의 ‘루피’ 등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분홍색 피부를 가졌거나 의상을 착용한다. 최근 동요 동영상으로 인기를 끌었던 핑크퐁의 ‘상어가족’ 역시 아빠는 파란색, 엄마는 분홍색으로 묘사됐다.

극의 흐름상 중요한 역할도 대부분 남성 캐릭터가 맡는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12년 발표한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에 따르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보다 남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약 3배가량 많았다.

로보카 폴리의 한 에피소드에서 여성 캐릭터 엠버는 위기 상황에서 임무를 포기하지만 다른 남자 대원들의 설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는 능동적 남성과 수동적 여성이라는 고정된 성역할을 보여준다. 

남성캐릭터는 ‘능력’…여성캐릭터는 ‘외모’ 부각

[기획] “힘든 일은 남자가, 여자는 외모 치장만?”…어린이 애니메이션 속 성편견 여전능력이 부각되는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성 캐릭터는 외모를 중요시한다.

출동! 슈퍼윙스에 등장하는 캐릭터 소개에서 남성인 ‘호기’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택배 비행기’, ‘도니’는 ‘만들기의 달인’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여성인 아리는 ‘귀엽고 당찬 구급 헬리콥터’로 나온다.

꼬마버스 타요도 남성 캐릭터인 ‘타요’와 ‘로기’는 호기심이 많거나 활달한 성격으로 묘사되지만, 여성 캐릭터인 ‘라니’는 ‘상냥하고 귀엽지만 겁이 많은 애교 만점 꼬마 숙녀 버스’로 소개된다.

극 중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은 외모 치장에 몰두한다. 

‘선물공룡 디보-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편’에서는 외모로 주목받고 싶어 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쿵푸 공룡 수호대-철부지 지미 편’에서는 여성인 ‘루시’가 친구를 도우러가던 중 치장에 몰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분홍색은 여자색, 파란색은 남자색”…아이들 성편견 뚜렷

4세 이상 아이들 사이에서 성편견은 빈번하게 관찰된다.

경기 평택시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정모(26·여)씨는 “유치원에 남자 담임교사가 있으나, 아이들이 ‘선생님 놀이’를 할 때 보살핌을 담당하는 담임 역할은 늘 여자아이들의 몫”이라며 “남자아이들은 활동적인 체육 교사 역할을 맡는다”고 밝혔다. 

이어 “분홍은 ‘여자색’이고 파랑은 ‘남자색’이라는 인식이 강해 남자애가 분홍색을 좋아하면 놀림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정씨는 “교사가 여자애들한테 ‘멋지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멋진 건 남자고 여자한테는 예쁘다고 해야죠’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 당황스럽다”고 덧붙였다. 

한국유아교육학회 회장을 지낸 경성대학교 유아교육과 이연승 교수는 “아동은 발달 시기에 관찰만으로도 학습이 가능하다”며 “남성 위주로 진행되거나 성편견이 스며있는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이 볼 경우 자연스레 성적 고정 관념을 습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작사 “앞으로 보강하겠다”했지만…중요성에도 아동용 프로그램 모니터링 예산 없어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성편견을 불러일으킨다는 지적에 대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수용 의사를 표명했다.

출동! 슈퍼윙스의 제작사 ‘퍼니플럭스’는 “고정된 성 역할을 학습시킨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기획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부족한 부분은 시즌 2에서 더욱 보강하겠다”고 답했다.

전문가는 어린이에 대한 성평등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이수연 선임연구위원은 “노르웨이나 핀란드의 경우 시기상 유치원 또래 아이들의 성평등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최근 여성가족부가 ‘성차별을 없애겠다’며 대중매체 모니터링 강화를 밝혔지만 가장 중요한 건 유아 프로그램”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성편견’ 모니터링은 전무한 상태다.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아동용 프로그램 속 양성평등과 관련해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2012년에 모니터링을 한 번 진행한 뒤 이어오지 못했다”며 “예산상 어려운 부분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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