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한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3-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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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광장 다음 일정은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서 시작한 벤츠 탑승 관광은 스페인 광장에서 끝이었다. 정말 좁은 도로를 이동하는데 기동성을 갖추기에 적절해보여 잘했다 싶었다. 

스페인광장을 출발한 버스는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을 에둘러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 가까운 곳에 섰다. 조국의 제단이라고 부르는 이 기념물은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에 난립한 도시국가들을 통합해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Vittorio Emanuele II)를 기리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쥐세페 사코니(Giuseppe Sacconi)가 로마 포럼을 신고전주의적으로 해석한 절충주의 양식에 따라 조국의 제단을 설계해 1885년 건설이 시작됐다.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해당 지역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해야 했다. 기념비를 건설하기 위해 오래된 건물들을 파괴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전면에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있고, 코린트양식의 기둥을 세운 열주회랑을 배경에 세웠다. 회랑의 양끝에는 4륜 전차를 타고 있는 승리의 여신을 각각 세웠다. 그리고 분수와 계단 등을 곁들였다. 총 면적 1만7550㎡의 대지에 설치된 구조는 너비 135m이고 높이는 70m이나, 승리의 여신을 포함하면 81m에 달한다.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면 로마 시내를 사방으로 돌아볼 수 있다. 

기념건축물에 들어간 많은 조각 작품들은 이탈리아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각들이 참여해 제작한 것이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 아래 있는 로마여신의 석상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묘와 영원한 불꽃을 밝히고 있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1921년 11월 4일,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한 무명용사의 시신을 옮겨 묻었다.

1911년 공사가 부분적으로 완성된 상태에서 토리노 국제박람회와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6월 4일 개막하게 됐지만, 나머지 공사는 1935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됐다. 브레시아(Brescia)의 보티키노(Botticino)에서 가져온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기념비가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갈색 건물과 비교해 튀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로마 사람들은 라 토르타 누지알레(la torta nuziale, 웨딩 케이크), 라 덴티에라(la dentiera, 틀니), 마키나 다 스크리베레(macchina da scrivere, 타자기) 등 다소 폄하하는 듯한 별명으로 부른다.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면 캄피돌리오 언덕인데, 올라가는 길 왼쪽으로 아라 코엘리의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Ara coeli)이 있다. 조국의 제단과 대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참 아래 허물어진 건물이 두어 채 남아있다. 로마시절 아파트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국의 제단을 짓기 위해 이런 건물들을 쓸어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약 그랬다면 로마를 침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반달리즘은 로마이즘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가 세워진 7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이며 해발 35.9m이다. 이 언덕 위에는 주피터, 주노, 미네르바 등 카피톨린 삼위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캄피돌리아 언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코르도나타(Cordonata)라는 완만한 경사의 돌계단의 끝에 캄피돌리오 광장이 있다. 광장 입구의 양편에는 로마 공화정 시절 로마군을 도와 주변의 부족들을 물리친 디오스쿠리 형제의 석상이 있다. 캄피돌리아 언덕과 사원은 로마제국 시절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의 상징이었다. 

캄피돌리아 언덕은 로마왕국의 건설과 관련이 있다. 로마왕국을 건설한 로물루스였지만, 주민을 늘리기 위하여 인근에 사는 사비네(sabines) 부족과 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로마사람들이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상할 것을 두려워한 사비네 사람들은 로마사람들과 통혼을 거절했다. 로마사람들은 사비네 여성들을 납치했고, 두 부족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캄피돌리아 언덕의 요새 공략에 나선 사비네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는 로마 성주의 딸 타르페이아(Tarpeia의 도움을 받아 요새 공략에 성공하지만, 이내 로마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했고, 결국 사비네와 로마는 협력하게 됐다. 부족을 배신한 타르페이아는 캄피돌리아 언덕에서 내던져졌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1547년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세 개의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데, 좌우의 건물은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문서보관청이던 정면의 건물은 로마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서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기독교도들이 로마제국 곳곳에 서있던 황제들의 청동상을 녹여 없앴는데, 캄피돌리오 광장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동상으로 오인한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팔라쪼 데이 콘세르바토리(Palazzo dei Conservatori)에 들어있는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제국의 오현제의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철인황제로 꼽힐 정도로 철학적으로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금욕과 절제를 주장해 에픽스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명상록’에는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 본성, 자연의 이치, 이성, 선과 악, 순응하는 삶, 사회적 존재, 영혼, 도덕적 삶 등 12가지의 주제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의 결과가 담겨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라. 절대로 격노하지 말고, 절대로 냉담하지 말고, 절대로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다”라는 대목은 마음에 새겨둘만 하다.

캄피돌리오 광장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서 있는 건물이 콘세르바토리 궁전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주피터신에게 헌정된 신전,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Maximus Capitolinus)가 있던 장소에 중세시기에 콘세르바토리 궁전이 세워졌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개조해 2층에 이르는 코린트식 기둥과 1층에 그치는 이오니아식 원주를 세워 전면을 장식했다. 

궁전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그레고리 카노니코(Gregory Canonico)가 1576년부터 1583년 사이에 지어 지안 피에트로 카페렐리 2세(Gian Pietro Caffarelli II)가 사용한 궁전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로마주재 독일대사관으로 사용됐다. 종전 후 로마시는 궁전 동쪽을 해체해 테라스를 만들었다.

광장 입구에서 보면 전면에 있는 건물은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이다. 13~14세기 무렵 고대 로마의 기록보관 장소이던 타불라리움(Tabularium)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18세기에는 원로원의 아본디오 레초니코(Abbondio Rezzonico)가 사용했고, 지금은 로마 시청이 들어있다. 궁전에 이르는 이중의 경사로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이다. 

계단 2층은 예전의 계단과 궁전의 오른쪽 2층 로지아를 대체한 것이다. 계단 앞에 있는 분수대의 중앙 벽감에는 로마 여신 미네르바를 모셨고, 그 오른쪽에는 테베레강의 신을, 왼쪽에는 나일강의 신을 조각했다. 미켈란젤로는 건물의 전면에 2개 층을 잇는 코린트 양식으로 주두를 장식한 기둥을 세웠다. 중앙에 있는 종탑은 마르티노 론기(Martino Longhi)의 설계로 1578 년에서 1582 년 사이에 건설됐다. 

팔라초 누오보(Palazzo Nuovo)는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맞은편에 있다. 광장의 대칭성을 맞추고 아라코엘리 교회의 탑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1603년에 짓기 시작해 1654년에 완공됐다. 기본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같은 설계를 적용한 것이다. 

캄피돌리아 광장 구경을 마치고 세나토리오 궁전의 왼쪽으로 돌아가다 보면 누파 카피톨리나(Lupa Capitolina), 로마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카피톨린 늑대의 젖을 마시는 쌍둥이의 청동상을 볼 수 있다. 이 청동상은 길이 114㎝에 높이 75㎝으로 원본보다 조금 큰데, 원본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의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늑대는 주변에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듯 으르렁거리며 긴장한 모습인데 반해 쌍둥이 아이들은 주변 분위기에는 관심 없이 늑대 젖을 빠는데 열중하는 모습이다. 

청동 늑대상은 기원전 5세기 무렵 에트루리아 시절 제작된 것으로, 그리고 15세기 후반에 조각가 안토니오 폴라이올로(Antonio Pollaiolo)가 쌍둥이를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군신 마르스가 레아 실비아라는 여성에게 반해 관계를 가졌다. 임신한 실비아는 쌍둥이 아들을 낳아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주피터에게 야단을 맞을 것을 두려워한 마르스는 쌍둥이를 테베레 강에 버렸다. 강을 따라 흘러내려가던 쌍둥이 형제를 발견한 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 쌍둥이가 커서 로마왕국의 시조가 됐다.

일설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아스(Aeneas)는 일가를 이끌고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의 라티움(Latium)으로 이주 정착했다. 아에아테스의 16대 손 누미토르 왕에 이르러 동생 아물리우스가 왕위를 찬탈하고는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불의 여신 베스타(Vesta)의 무녀로 만들었다. 군신 마르스가 실비아를 범해 쌍둥이를 낳은 것은 앞서 이야기와 같지만 쌍둥이를 테베레 강에 버린 것은 마르스가 아니라 아물리우스(Amulius) 왕이었다고 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서른한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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