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세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11-20 0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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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국경마을 키바르타이(Kybartai)에서 트라카이(Trakai)로 가는 동안 전날 폴란드에서 이야기했던 영화 ‘Miasto 44’를 관람했다. 우리나라에는 ‘바르샤바 1944’라는 제목으로 2015년에 개봉했다. 얀 코마사 감독이 2014년에 완성한 폴란드 영화 ‘Miasto 44’는 1944년 8월 1일,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봉기를 소재로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초콜릿 공장을 다니면서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는 스테판(요제프 파블로프스키 粉)은 나치로부터 매일 모욕을 당한다. 그때마다 반나치 저항군에 가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한다. 하지만 결국은 친구들과 함께 반나치 지하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그곳에서 알라(소피아 비츨라츠 粉)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44년 8월 1일, 폴란드 저항군의 봉기가 시작되면서 스테판 역시 전투에 가담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20대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희망과 열정이 이야기되다가, 후반에서 폴란드 사람들의 봉기를 나치가 무자비하게 진압이 시작하면서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들로 점철된다. 

각설하고, 영어로 리투아니아(Lithuania)라고 부르지만 리투아니아어로는 리에투바(Lietuva)인 이 나라의 공식명칭은 리에투보스 레스푸블리카(Lietuvos Respublika)다. 북쪽은 라트비아, 동쪽과 남쪽은 벨라루스, 남서쪽은 러시아의 월경지 칼리닌그라드주와 국경을 나누고 있다. 서쪽에는 발트해에 연한다. 영토의 전체 면적은 약 6만5300㎢로 한반도의 3분의 1 크기이다. 인구는 약 279만명이며, 리투아니아인이 86.7%, 폴란드인이 5.6%, 러시아인이 4.8%를 차지한다. 수도는 빌니우스(Vilnius)이다.  

‘리에투바’라는 나라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비’를 의미하는 리투아니아어 ‘lyti’와 ‘lietus’에서 유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많은 발트어 지명이 물과 관련이 있다는데 착안해 초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카르나베(Kernavė) 부근을 흐르던 강 이름이 리에타바(Lietava) 혹은 리에타카(Lietauka)였다는 것과 연관을 지어, 리에타바가 레투바/리에투바(Lētuvā/Lietuva)로 발전했을 것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가 아르투라스 두보니스(Artūras Dubonis)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초기의 사회 집단이었던 레이치아이(leičiai)에서 리에투바가 왔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지역에 인류가 처음 정착한 것은 기원전 1만년의 마지막 빙하기로서 쿤다(Kunda), 네만(Neman) 그리고 나르바(Narva) 문명을 일궜다. 기원전 8000년 무렵에는 날씨가 온화해지면서 숲이 발달하게 됐다. 지금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선조인 인도-유럽계 사람이 들어온 것은 대략 기원전 2500년 무렵으로 농경문화가 시작됐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발트연안에 사는 아에티(Aeti) 사람들에 대해 기술했고, 프톨레미 역시 지금은 사라진 발트연안의 갈린다 사람과 요트빈가 사람에 대해 적고 있다. 이들은 로마제국과 많은 접촉은 없었지만 호박을 거래한 것으로 보인다. 

리투아니아라는 지명은 쿠에딘부르겐시스 연대기(Annales Quedinburgenses)에 처음 등장한다. 오늘날 독일 작센주의 안할트(Anhalt)에 있던 쿠에들린부르크 수도원의 수녀들이 창세기로부터 1025년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주로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한)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연대기에 기록된 리투아니아 관련 사건은 다음과 같다. “보니파스(Boniface)라는 대주교이자 수도사인 브루노 성인(St. Bruno)은 11월에 키에프 루스와 리투아니아 국경에서 이교도에 의해 살해됐으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18명과 함께 3월 9일에 천국에 들어갔다. 당시 브루노 성인은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수도원을 세워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라는 교황 오토 3세의 명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리투아니아 지역은 10세기 이전까지 튀르크 계열의 아바르 카간국과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를 받았다. 1253년 7월 6일 빌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발트부족의 민다우가스(Mindaugas)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1386년에는 리투아니아 왕국의 요가일라(Jogaila)가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함에 따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이뤘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무찌름으로써 독일의 동방 팽창을 저지했다. 리투아니아는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성기의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은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나라였다.

18세기 말 연방이 취약해지면서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세 주변국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를 3차례에 걸쳐 분할해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리투아니아는 1795년에 러시아 제국에 편입됐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1795년, 1830년, 1863년 등 3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18년 2월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으로 출발했다. 독립을 선언한 이후, 복잡한 이념세력들의 정권투쟁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다가 1930년대 들어 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반소, 반공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독일과 소련은 중앙유럽을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의정서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점령했다.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다시 점령했는데, 전후 리투아니아를 다시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2만9923가구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12만명을 국외로 추방했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소비에트연방에 속했다. 리투아니아는 소련연방국가 가운데 최초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경제제제를 가하는 등 압박을 하다가 1991년 1월에는 군대를 투입했다. 소련군의 리투아니아를 침공으로 13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에 독립을 이뤄냈고, 9월 17일에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3시 45분 트라카이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키비나이(Kibinai)인데 리투아니아어로는 키비나스(kibinas)라고 한다. 식당 이름이 키비닌(Kibinine)인 것을 보면 키비나이 전문점인가 보다. 키비나이는 밀가루로 만든 피에 다진 양고기와 양파를 채워 넣은 빵과자(pastry)의 일종이다. 트라카이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카라임(Karaim)부족이 즐겨 먹는 전통음식이다. 

터키어를 사용하는 카라임 부족은 카라이테(Karaite) 유대교를 신봉하는 투르크계 부족으로 원래 수세기에 걸쳐 크림반도에서 살아왔다. 1218년 리투아니아대공국의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이 크림반도에 사는 카라임 마을을 트라카이로 옮겨 살도록 하면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북유럽에 카라임 부족이 등장하게 된다. 

비타우타스 대공이 몽고제국이 멸망한 뒤에 들어선 황금군단(Golden Horde)와 전투를 벌일 때 카라임부족과 타타르 부족이 동참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영국의 콘월지방에서 먹는 콘월 페이스트리가 키비나이와 흡사한데, 13세기 초반에 시작됐다는 콘월 페이스트리의 유래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식탁에는 물과 함께 검붉은 음료가 놓여있다. 국경을 넘어오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해서 가이드가 백포도주를 사기로 했는데, ‘이건 뭘까?’ 싶었다. 키비나이에 따라 나오는 음료로 생각하고 맛보았더니 전주에서 마셔본 모주와 흡사하다. 조금 늦게 도착한 가이드가 흑빵을 발효한 크바스(Kvass, 러시아어로는 квас)라는 이름의 민속주라고 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기라(Gira)라고 한다. 

크바스라는 단어는 원시 슬라브어로 ‘발효음료’를 의미하는 ‘kvasъ’ 혹은 ‘신 것’을 의미하는 원시 인도-유럽어 ‘kvasъ’에 뿌리를 둔 옛 교회 슬라브어 ‘квасъ’에서 유래했다. 크바스는 고대 러시아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보리로 만든 맥주, 아프리카의 퐁베(pombe) 혹은 기장맥주, 아시아의 막걸리, 아메리카 원주민이 옥수수나 카사바로 만든 치차(chicha) 등 곡물음료와 흡사하다. 1113년 키예프에서 엮은 네스토르(Nestor) 연대기는 크바스가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문헌이다. 네스토르(Nestor) 연대기는 서기 850년부터 1110년 사이의 키예프 러시아의 역사를 엮은 것이다. 

전통적인 크바스는 일반적으로 빵 부스러기와 여러 종류의 맥아(호밀 맥아가 선호되었지만 보리나 밀 맥아를 사용하기도 한다)를 끓는 물에 넣어 섞은 다음, 전분에 맥아효소가 작용할 수 있도록 몇 시간 동안 적당히 열을 가한다. 그 다음에는 물을 더해서 희석하고 효모와 향료를 첨가하여 따뜻한 곳에서 며칠 동안 발효한 뒤에 걸러낸다. 밀, 보리, 호밀 등을 원료로 사용해왔는데, 요즘에는 주로 호밀을 사용하고 이른 봄에 수집한 과일, 베리, 건포도 또는 자작나무 수액을 사용해 맛을 낸다. 

점심을 먹고는 트라카이 성이 있는 갈브 호수(Galves Ezeras)로 요트를 타러갔다. 이 일대의 지형이 묘하다. 갈브 호수를 중심으로 아카메나(Akamena) 호수와 스카이스티스(Skaistis) 호수가 양 날개를 펴듯 펼쳐진다. 특히 갈브 호수의 남쪽으로는 트라카이 반도가 호수의 중앙까지 돌출돼있다. 마치 꿀벌의 모습을 닮았다고나 할까? 꿀벌의 몸통을 닮은 갈브 호수는 북서-남동 축의 길이가 3.28㎞이고, 최대 너비는 1.96㎞다. 호수 동쪽이 깊은데 최대 46.7m에 달한다. 호수의 남쪽에는 다양한 전설이 전해오는 21개의 섬이 몰려있다.

그 가운데 트라카이 성(Trakų pilis)이 있는 성 섬(Pilies sala)이 중요하다. 트라카이 성은 핀란드의 라도가(Ladogos) 호수에 있는 오레섹 요새(Orešeko tvirtovė), 사이마(Saimaa) 호수에 있는 성 올라프 성(Olafo pilis), 러시아의 비보르크 성(Vyborgo pilis) 등 동유럽과 북유럽의 섬에 있는 몇 안 되는 중세 성의 하나이다. 

트라카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트라카이 성은 35 x 21m 규모의 성과 40 x 55m 규모의 사다리꼴을 한 마당으로 구성되는 요새로 이루어졌다. 14세기 후반 캐스투티스(Kęstutis) 공작이 지금의 성이 들어선 세 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큰 북쪽 섬에 석조 성을 지었다. 1377년 튜턴기사단의 공격을 받아 성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성을 재건하면서 확장하게 되는데 두 개의 날개를 추가하고 남쪽에는 6층(35m 높이)의 요새를 건설했다. 붉은 고딕 벽돌과 각석(角石)을 사용해 로마네스크 풍의 고딕양식으로 건설했으며, 윤기 나는 지붕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이 볼만하다. 15세기 초에 전망대를 확장하면서 벽을 2.5m 두께로 강화했고, 성 귀퉁이에 3개의 방어탑을 세웠다. 모스크바 전쟁(1655~1660) 동안 파괴된 성은 오랫동안 무인 상태로 방치됐다. 20세기 초에 조사가 시작ㄷ했고, 1951년부터 광범위한 연구와 보존이 시작되면서 1962년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열세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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