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천문’ 허진호 감독 “한석규-최민식에게 역할 결정권… 작전이었죠”

허진호 감독 “한석규-최민식에게 역할 결정권… 작전이었죠”

기사승인 2019-12-3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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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연기 디렉팅만 해도 그렇다. 촬영 전부터 배우와 함께 연기 톤을 가다듬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배우에게 맡기는 감독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감독이 있고, 배우가 생각지도 못한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도 있다. 같은 감독이라도 작품마다 연출 방식이 달라진다. 답을 내리기 힘든 오묘한 세계다.

영화 ‘천문’은 멜로 거장으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만큼 배우들의 존재감이 큰 영화다. 90년대부터 한국영화를 이끌어온 배우 한석규, 최민식을 중심으로 신구, 허준호, 김태우 등 사건보다 인물의 비중이 크다. 감독은 이 배우들의 역량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을 정하지 않고 배우들에게 선택하도록 맡겼다고 했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두 사람을 한 번에 캐스팅하려는 작전이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한석규, 최민식 배우를 먼저 생각했어요. 한석규 배우는 한 번 작업한 적이 있고(‘8월의 크리스마스’), 최민식 배우는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천문’은 세종과 영실의 조화가 중요한 영화인데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둘에게 세종과 장영실 중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한 건 작전이었어요. 한 명만 캐스팅하는 게 아니라, 같이 캐스팅하려고 한 거죠. 한석규 배우가 드라마에서 세종을 한 번 연기했기 때문에 장영실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나왔어요. 그런데 한석규 배우가 다르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영의정 역할은 누가 좋을까 고민했는데 두 분다 신구 선생님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부탁을 드렸고 신구 선생님이 참여하게 되면서 캐스팅이 수월해졌어요. 배우들도 어떤 배우와 같이 연기해보고 싶다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천문’은 신하들에 둘러싸여 정사를 논하는 세종보다, 장영실과 시간을 보내고 남몰래 고민하는 세종의 모습이 더 길게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공적인 세종의 모습 대신, 일상의 사적인 세종을 그리는 데 더 집중한 모양새다. 세종의 두 가지 모습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다가 두 세계가 충돌하는 장면이 있다. 세종이 정남손(김태우)를 문책하며 “개새끼야”라는 날 것의 언어로 호통 치는 순간이다. 허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촬영은 돼 있지만 촬영한 장면은 아니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웃었다.

“그 장면의 긴장감이 정말 중요하죠. 세종이 눌러왔던 것이 신하들과의 긴장감 속에서 폭발하는 느낌이 중요해서 공들여서 찍었어요. 찍고 나서 편집을 하는데 뭐가 좀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여러 테이크를 찾다가 한석규 배우가 욕하는 장면을 발견했어요. 이게 왜 있지 싶었죠. 현장에서 ‘슛 갑니다’ 하면 카메라가 먼저 켜지고 녹음을 시작하면서 준비를 해요. 그 때 한석규 배우가 ‘너냐’라는 대사를 연기하기 전에 ‘개새끼야’라는 욕의 느낌을 넣고 싶었던 거예요. 그게 살아남은 거죠. 처음엔 좀 위험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맥락상 갑자기 나오는 느낌도 있어요. 하지만 갑자기 얼어붙는 그 느낌이 일종의 쾌감을 준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천문’은 사료에 남아 있는 역사를 자유롭게 해석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역사 논란을 걱정할 법 하지만 허 감독은 자신감을 보였다. 실제 역사와 상상력을 잘 구분했다는 의미였다.

[쿠키인터뷰] ‘천문’ 허진호 감독 “한석규-최민식에게 역할 결정권… 작전이었죠”

“자료를 기반으로 상상력을 펼쳤지, 상상을 먼저 한 건 아니에요. 안여(安與)사건 만으로 장영실을 내칠 리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당시 시대 상황을 봤어요. 한글이 나오기 바로 직전 시기이고 세종이 자격루 같은 기계에 관심이 많았잖아요. 당시 자격루는 아라비아와 중국, 조선 세 나라만 갖고 있었어요. 세종이 장영실을 얼마나 예뻐했겠어요. 장영실 관련 자료가 많이 없으니까 팩트에 기반해서 이렇게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대다수의 관객들은 아직도 허진호 감독을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같은 멜로영화 전문 감독으로 기억한다. 물론 멜로를 연출하는 허 감독 특유의 감성은 ‘천문’에도 잘 담겼다. 하지만 허 감독은 특정 장르보다는 부지런히 영화를 계속 찍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저도 한석규 배우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아마 최민식 배우나 한석규 배우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지금의 조합을 다시 만날 날이 올까 싶어요. 석규 씨도 20년 만에 만났잖아요. 앞으로도 부지런히 영화를 계속 만들자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관심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를 선택해서 만들자고요.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죠.”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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