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살인, 일본 닮을라 [쿠키 칼럼]

서울의 묻지마 살상은 일본의 도리마 연상케 해
20년전부터 끊임 없이 되풀이되는 무차별 범죄
초격차 사회 해소하지 않으면 한국도 위험하다

기사승인 2023-08-01 05: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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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 열차가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습관이다. 일본 생활 초창기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선로로 밀어 떨어뜨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 일본의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묻지마 살인이었다. 일본에선 확대 자살 또는 무차별 살상이라 부른다. 일본에 정착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음 깊은 곳에 불안이 남아 있다. 아니 더 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엔 처음 방문하는 건물에선 비상구와 대피로를 확인한다.

도리마(通り魔).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해를 주는 마물(魔物)을 일컫는 말. 요즘엔 불특정 다수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범죄자를 도리마라고 한다. 번역하면 길거리 악마다. 도리마들은 꼭 이런 말을 한다.

“아무나 상관 없었다(誰でも良かった).”

지난 달 서울 신림역 주변에서 일어난 흉기 난동 사건은 일본에서도 보도됐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한 지인은 내게  물었다.

“이제 한국도 무차별 살상 사건이 일어나는 나라가 된거냐?”

나도 무척이나 걱정스럽다.

묻지마 살인, 일본 닮을라 [쿠키 칼럼]
스크린도어가 많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일본의 전철역에서는 여러가지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Pexels.com 사진


분노는 빠르게 퍼진다

일본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묻지마 살인이 사회 문제가 됐다. 1999년 대낮의 도심 번화가에서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다친 이케부쿠로 무차별 살상사건 당시 범인이 사회 불만이 범행 동기라고 말해 큰 충격을 주었다.

2001년에는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을 해칠 목적으로 흉기를 들고 초등학교에 난입한 오사카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이 있었다. 8명의 아이들이 희생됐다. 2008년에는 오타쿠들의 성지로 알려진 도쿄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트럭이 돌진해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 역시 체포 직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누구든 상관없었다”고 말했다.

주도 면밀한 계획 범죄로 36명이 희생된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2019년), 26명이 희생된 오사카 정신과 방화사건과 오다큐센 무차별 살상 사건(모두 2021년), 지난 해의 도쿄대 앞 흉기 난동 사건. 일본 사회에서는 무차별 살상 사건이 잊을만하면 터진다. 요즘에는 계획적이기까지 하다. 불안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묻지마 살인, 일본 닮을라 [쿠키 칼럼]
도쿄 번화가 아키하바라에서 2008년 벌어진 묻지마 살인은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위키피디아 자료사


격차 사회의 좌절과 분노

일본 법무성 산하 연구기관에서 2013년 무차별 살상 사건을 일으킨 52명의 판결 등을 분석한 보고서를 펴냈다. 사건의 주된 동기는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고립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정 불화 또는 경제적인 이유로 진학을 포기하거나 과도한 스펙 경쟁에 뒤쳐져 취업 장벽에 좌절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개인의 불행. 여기에 비정규직 같이 미래가 불확실한 일자리가 늘고 소득 격차가 커지면서 양극화되는 격차사회 현상은 불행한 개인을 좌절케 했다. 저출산 고령화 같은 사회적 문제가 이 같은 사건의 배경에 있다는 지적도 늘상 나온다.

일본 사회는 경제 성장이 정체된 90년대 말 이후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적 초격차 사회로 진입했다. 이제는 승리조(勝ち組-Winner)와 패배조(負け組-Loser)로 확실히 나눠졌다고 한다. 한 번 패배조로 떨어지면 도무지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 불평등이다. 이런 사회 문제와 개인의 불행이 곳곳에서 무차별 살상 사건을 일으킨다.

한국은 일본과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최근에는 초저출산, 초격차 사회를 향해 일본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불행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좌절을 겪는 이들도 늘어난다. 좌절감이 사회를 향한 분노로 치닫는 걸 미리 막지 못한다면 한국에서도 제2, 제3의 도리마가 등장할 수 있다.

어쩌면 그 지인은 일본이 겪고 있는 이런 선진국형 사회 문제에 한국은 얼마나 대비가 되어있는지 물었던 것은 아닐까?

묻지마 살인, 일본 닮을라 [쿠키 칼럼]
일본 열도의 끝에 선 필자


김동운
1978년 서울출생.  일본계 모터싸이클 회사의 한국지점 입사를 계기로2008년 일본으로 넘어와 글로벌 IT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며 한일 양국에 한 발씩 걸친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현재거주지는 시노노메(東雲). 김동운은 필명이다. icaroos2@hanmail.net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