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배상 50% 하라더니 0% 웬말” 홍콩 ELS 가입자 분통

금감원장 “일괄배상 없다”
DLF 보다 넓어진 배상비율 범위…100% 배상 극소수 전망
은행-가입자 합의 어려울 듯…“사실상 자력구제 하라는 것”
시민단체 “금융소비자 보호 후퇴”

기사승인 2024-03-07 06: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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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배상 50% 하라더니 0% 웬말” 홍콩 ELS 가입자 분통
지난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기초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자들이 피해 보상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홍콩H(항셍중국기업지수)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사태와 관련해 일괄배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배상비율이 0~100%까지 차등화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7일 금감원 배상기준안을 기다리고 있던 피해자와 시민단체는 “무책임한 태도”라며 비판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이 원장이 금융사에 ‘손실액 50% 자율배상에 나서라’고 하더니 말바꾸기를 했다며 원성이 높다. 시민단체들은 금융소비자 보호가 뒷걸음질 쳤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지난 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홍콩 ELS 투자자들이 원금 100% 배상을 요구하는 것과 관련해 “차등 배상이 원칙”이라며 일괄 배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배상기준안 발표 시점과 관련해서는 “연령층, 투자 경험 등을 고려한 수십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11일을 예상한다”라고 밝혔다.

투자자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배상비율 100%를 받는 가입자는 극소수에 그칠 것이고, 하한선이 없는 만큼 이번 배상기준안이 DLF 보다 후퇴했다고 본다. 금융 당국은 지난 2019년 DLF 손실 사태 당시에는 기본 배상률 55%(적합성원칙·설명의무 위반 30%, 금융기관 내부 통제 부실 20%, 초고위험 상품 특성 5%)를 제시했다. 배상비율은 최소 40%에서 최대 80%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상비율이 0%에서 100%로 범위가 넓어지게 됐다. 금융당국의 기준대로라면, 홍콩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이 나지 않는다는 은행원의 말을 믿고 ELS에 재가입한 경우에도 배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홍콩 H지수 ELS와 관련한 이 원장 발언도 투자자 혼란을 키웠다. 이 원장은 지난달 5일 기자간담회에서 “불법, 합법을 떠나 금융권의 자체적이 자율배상이 필요하다”며 “최소 50%라도 먼저 배상을 진행하는 게 소비자 입장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기대를 걸고 배상기준안을 기다리던 피해자가 적지 않았다. 지난 20일에도 금감원은 입장문을 통해 금융 분쟁 조정은 금감원 고유 업무라며 적극 개입을 강조했다. 정작 최종 배상기준안은 한발 물러서며 이 원장 발언은 투자자 기대만 돋군 꼴이 됐다.

길성주 홍콩ELS피해자모임 위원장은 “피해자들은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이 원장 입장이 도대체 일관성이 없다. 무슨 잣대로 배상기준안을 만드는 건가”라면서 “금감원은 은행 편만 들고 피해자를 갈라치기 하고 있다. 울며 겨자먹기로 합의하는 이들과, 끝까지 배상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들로 결국 나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11일에 나오는 배상기준안을 보고 집단소송에 나서던지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금감원 출신 한 변호사는 “금감원이 현장, 서면 검사를 진행했지만 금융사들에 공통적으로 적용할만한 내부통제 부실 문제는 결국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금융상품 매매계약과 관련해 사기·착오를 이유로 법원 또는 금감원에서 계약취소가 인정된 사례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약취소 인정으로 원금 100%를 배상받는 ELS 투자자는 극히 소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가입자들이 각자 알아서 자력구제하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상기준안을 두고 가입자와 금융사간 갈등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자 다수는 최소 50%에서 100%까지 배상을 원한다. 하지만 금융사는 워낙 가입자가 많은데다, 자칫 배임혐의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배상비율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가입 금액이 크다는 점도 배상비율을 둘러싼 갈등을 키우는 요소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5대 은행을 통해 ELS 상품에 가입한 사람 수는 15만4300여 명이다. 합계 잔액은 14조6480억원으로, 단순 계산하면 1인당 평균 가입 금액은 약 9500만원에 달한다.

은행과 투자자 양측이 합의하지 못하면, 결국 투자자는 금감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하거나, 금융사와 소송전에 돌입하는 방법이 남는다. 하지만 홍콩ELS 가입자 규모를 고려할 때, 금감원 분쟁조정이 실질적으로 가능할지 미지수다. 법적 다툼을 벌인다 해도 가입자가 시중은행을 상대로 승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은행들은 벌써 김앤장, 화우 등 대형로펌과 손을 잡았다.

금감원이 은행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H지수 ELS 판매 실적 등을 핵심성과지표(KPI) 배점에 포함하고, 손실률을 20년이 아닌 10년으로 조작하는 등 금융사 내부통제를 문제 삼을 사안이 한 두개가 아니다. DLF 사태 이후 금융당국은 고난도 사모펀드에 대해 판매 원칙을 강화하는 조건으로 ELS 판매를 허용했다. 조건부 허용한 은행들을 상대로 책임을 가중해 물어야 할 판에 공통배상비율을 없앴다”며 “이 원장이 은행에 백기사를 자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정의연대·민변 민생경제위원회·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는 6일 논평을 내 “일괄배상은 없다는 결정은 금융소비자 보호를 DLF 사태때보다 심각하게 후퇴시키겠다는 것”이라며 “금감원이 발표할 책임분담 기준안이 미칠 사회적 파장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더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금감원에 충분한 실태조사를 통해 사태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밝히고, 폭넓고 두터운 배상 기준과 원칙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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