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1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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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반 무렵 종탑 가까운 곳에 있는 분수대에 모여 저녁을 먹으러갔다. 식당은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저녁 식단이 샐러드와 피자 한 판이라고 해서 정말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 판으로 나온 피자가 그리 크지 않아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피자의 기본이라는 마르게리타 피자다. 

1889년 사보이아가의 움베르토 1세와 마르게리타 왕비가 나폴리를 방문했을 때, 요리사 돈 라파엘 에스폰트가 왕비를 위해 피자를 만들게 됐다. 바질, 모차렐라, 토마토 등을 재료로 써서 만든 피자는 초록, 하양, 빨강으로 된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해, 마르게리타 왕비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래서 왕비의 이름을 붙여 피자 마르게리타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자 마르게리타는 피자 마리나라, 피자 마르게리타 엑스트라와 함께 나폴리의 3대 피자로 지정돼있다.

피자 마르게리타라고 하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치즈는 아펜니노 산맥 남쪽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차렐라만을 사용해야 하고, 크러스트는 반드시 손으로 반죽하며, 두께는 2cm 이하로, 가운데 부분의 두께는 0.3cm 이하로 해야 한다. 토핑은 토마토소스, 모차렐라 소스, 바질 잎만을 사용해야 하며 구울 때는 반드시 장작 화덕으로만 구워야만 된다. 

식사를 마쳤을 때는 벌써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피사의 성 너머로 낙조의 여운이 남아있다. 피사 대성당을 비롯해 대성당 종탑, 세례당 등은 구시가를 감싸는 피사의 성벽 밖에 세워졌던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도 안전하게 성벽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은 당시 피사공화국의 위상을 고려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피사의 북서쪽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1155년부터 1161년까지 포르텔로(Portello)에서 토레 델 아르노(Torre dell''Arno)에 이르기까지 피사시의 서쪽을 따라 쌓은 성벽의 길이는 3km에 이르며, 성벽 위의 폭이 꽤 넓어서 걷기에 좋아 보인다. 성벽에는 모두 4개의 성문이 있는데, 기적의 광장 세례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문은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 )라고도 부르는 포르타 산타 마리아 피사(Porta Santa Maria Pisa)이다.

휑하니 빈 주차장에서 외롭게 일행을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연일 9시를 넘기지 못하고 쏟아지는 잠에 굴복하는 것은 낮에 많이 걷기 때문이다. 일찍 잠들게 되니 일찍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탈리아 여행 5일째다. 이날은 전날보다 1시간 늦게 숙소를 나설 예정이라서 아침이 여유롭다. 식당에 내려갔는데 투숙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음식을 고르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길게 늘어서 있다. 한 번에 먹고 싶은 음식을 모두 챙겨야했는데, 과일이나 야채도 없는 차림이 시원치 않았다. 요기가 될 만큼만 적당히 챙겨서 먹었다. 해외여행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체력도 좋아야 구경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매 끼니를 든든하게 먹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다.

약속한 8시 40분에 피렌체로 출발했다. 아침기온은 9도로 쌀쌀한 느낌이 든다. 날씨가 맑아 다행이다.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피렌체는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38만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약 150만명이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으로 ‘중세의 아테네’라는 별칭을 얻었다.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으며,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피렌체사람들이 쓰는 말이 이탈리아의 문화 언어로 자리 잡았다. 단테 알리기에리, 페트라르, 조반니 보카치오, 니콜로 마키아벨리, 프란체스코 구치아디니 등 유명한 작가들의 걸작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이 도시는 수많은 르네상스 예술 및 건축물 및 유적으로도 유명하다.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과 피티 궁전(Palazzo Pitti ) 등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으며 미술, 문화 및 정치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도시는 기원전 200년 에트루리아사람들이 세운 피에솔(Fiesole)에서 시작됐다. 기원전 80년 로마제국의 술라, 루시우스 코르넬리우스(Lucius Cornelius)는 이곳 사람들이 평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도시는 서기 59년 줄리우스 시저가 병영을 세우면서 재건됐다. 2개의 강 사이에 건설됐기 때문에 '두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플루엔티아(Fluentia)라고 했던 것이 나중에 ‘꽃피는’이라는 의미의 플루엔티아(Florentia)로 변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로 동고트족과 비잔틴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6세기 들어 롬바르디아왕국 통치시절 평화가 찾아왔다. 774년에는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의 카롤링거 왕국에 합병됐다가 797년 신성로마제국에 속하게 됐다. 1002년 투스카니공국을 시작으로 19세기 초까지 이 지역 패권의 중심이 됐다. 

15세기 피렌체공화국 시절 양모산업의 호황으로 부를 쌓은 메디치가문의 후원을 바탕으로 문화예술의 흥융기를 맞아 르네상스시대의 문을 열게 됐다. 19세기 초에 잠시 프랑스제국에 속했다가 토스카나대공국을 거쳐 통일 이탈리아왕국을 거쳐 현재의 이탈리아공화국에 속하게 됐다.

피사에서 피렌체까지는 버스로 1시간반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여행에는 변수가 많은 법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첫 장면에 나온다는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는데 문제가 생겼다. 관광버스가 다니는 길을 통제하고 있어서 돌아가야 했다. 좁은 도로로 우회하는 바람에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결국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미켈란젤로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다비드 동상이 우리를 반긴다. 언덕 위에 조성된 미켈란젤로광장은 아르노강 건너편에 있는 피렌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건축가 주세페 포기(Giuseppe Poggi)가 설계한 이 광장은 1869년 아르노 강의 남쪽 둔덕을 재개발하면서 지었다. 왼쪽 (남) 은행 인 올 트라 르노 (Oltrarno)의 재개발 중 역사적인 중심의 바로 남쪽 언덕에 지어졌습니다.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된 피렌체는 도시재생을 의미하는 리사나멘토(Risanamento)를 시작했다. 아르노강변에 강변산책로(Lungarni)가 만들어졌다. 오른쪽 둔덕에는 14세기의 성벽을 허물어 프랑스의 가로수길을 모방한 순환도로(Circonvallazione)를 만들었고, 산 미니아토(San Miniato) 언덕으로 이어지는 왼쪽 둔덕에는 언덕 가로수길(Viale dei Colli)을 만들었다. 

8km의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에 미켈란젤로에게 헌정하는 광장을 지은 것이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작품(다비드상과 산 로렌조의 메디치성당의 알레고리)를 청동으로 뜬 모형을 세웠다. 이 기념비는 1873년 9쌍의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이곳으로 가져왔다.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아르노강의 왼쪽으로 ‘옛날 다리’라는 뜻의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가 보인다. 로마제국 시절 카시아(Cassia)가도가 이 근처에서 아르노강을 지났다고 했으니 로마시대에 이미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교각은 돌로 상부 구조는 나무로 되었다는 기록이 996년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1117년의 홍수에 파괴돼 재건했지만, 1333년 홍수에 다시 무너졌다. 1345년 죠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설계로 폭 32m의 다리를 다시 만들었다. 다리는 3개의 아치로 구성된다. 중앙의 아치는 30m의 길이고, 나머지 두 개의 아치는 각각 27m 길이다. 다리 위에 양쪽으로 들어선 상점들은 초기에 푸줏간 주인들의 차지였지만, 지금은 보석상, 미술상 혹은 기념품 판매점들이 들어섰다. 

폰테 베키오의 상점에서 고기를 팔아 부를 쌓은 부온델몬티(Buondelmonte)가 살해당한 다리 입구에 보면 단테의 천국편에 기록된 그의 행적이 새겨져있다. “아, 부온델몬티여! 남들 꼬임에 빠져 / 제 혼례를 피한 넌 얼마나 나빴던가! // 네가 처음 피렌체에 오는 동안 / 하느님께서 에마에게 넘겨주셨더라면 / 지금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살 텐데. // 피렌체의 평화가 끝나 갈 때 / 제 다리를 지키는 잘라진 돌에 희생자 하나를 / 제물로 바친 꼴이로구나!”

현지 가이드는 메디치가 사람들이 아르노 강변에서 도축이나 가죽세공을 하는 역겨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베키오 다리를 세웠다고 설명했지만, 그에 해당하는 것은 바사리 회랑인 듯하다. 1565년 메디치가의 코시모1세는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과 피티 궁전(Palazzo Pitti)을 잇는 길을 위해 죠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로 하여금 회랑을 건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바사리회랑이라고 부른 이곳에서는 도축업자의 장사를 금했다. 

베키오 다리의 상점 주인들은 거래조건을 말하기 전에 시장, 행정관 혹은 경찰 등의 승인을 받은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아야 했다. 파산의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환금을 하려는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가 팔았던 상품을 올려두었던 탁자(banco)를 군인들이 부쉈다(rotto)고 한다. ‘탁자를 부수다’라는 의미로 이런 행위를 방코로토(bancorotto)라 했다. 여기에서 파산이라는 의미의 방카로타(bancarotta)가 나왔다. 더 이상 탁자가 없는 상인은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베키오 다리에서 두오모에 이르기까지 피렌체의 모습을 예쁘게 찍을 수 있는 촬영장소를 두고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현지 가이드가 순서대로 우리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는데 옆에 붙어서는 얌체족도 있다. 사진촬영을 금세 마치는 것도 아니고,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등 시간을 끄는데 보니 한국에서 온 분들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열여섯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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