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두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1-15 01: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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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의 집 앞에는 롤랑(Roland)의 석상이 서있다. 롤랜드 성인의 동상이라는 설명도 있다. 롤랜드 성인은 1140년 프랑스 셰제리(Chézery)에 세워진 시토수도원의 3번째 수도원장이었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어느 더운 날 릴렉스(Lélex)로 가던 롤랜드 성인이 목마른 죽음의 신을 만났다고 한다. 

성인은 사신에게 포도주나 물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사신은 포도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술을 축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자신은 가난하다고 말했다. 사신의 대답을 들은 롤랜드 성인이 지팡이로 땅을 치자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장소는 오늘날 축복받은 샘의 성소로 기념되고 있다.

리가의 시청광장에 서있는 석상은 롤랜드 성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전설적인 기사 롤랑의 석상이다. 리가의 수호신이다. 프랑스 샤를마뉴대제의 12기사 중 수석기사인 롤랑(Roland)은 16세기 이탈리아 작가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를 비롯해 프랑스 최고(最古)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세 유럽의 전설적인 기사다.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광란의 오를란도’를 뼈대로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 무훈시에 등장하는 롤랑은 778년 샤를마뉴대제가 스페인 원정에서 치렀던 론스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사료에 기록돼있는 브르타뉴 변경백 롤랑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롤랑은 샤를마뉴대제가 하사한 전설의 칼 뒤랑달(Durandal)을 사용했는데, 강하고 예리해서 기사의 투구는 물론 그 몸통과 말까지 단칼에 토막을 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주군을 보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롤랑의 영웅적인 행적을 담은 서사시는 11세기 무렵에 유럽 전체로 퍼져 애송됐다.

12세기 들어 교회 밖에 롤랑의 목상(木像)이 처음 세워졌다. 14세기 들어 사암으로 만든 롤랑의 석상이 많아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보헤미아의 카렐4세(Karel IV)가 샤를마뉴대제의 통치이념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내세우려는 속셈에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중세 들어 많은 도시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상징으로 롤랑의 석상을 세웠다. 따라서 시장 혹은 시청광장에 세워지게 됐다. 훗날에는 로마교회의 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더해지면서 작센법이 적용되는 지역에서 많이 세워졌다. 

리가시청 광장에 있는 롤랑의 동상은 오른손에 검을 치켜들고 왼손에는 리가의 문장을 새긴 방패를 들고 있다. 1897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제작자는 분명치 않다. 광장에서 보는 롤랑의 동상은 복제된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광장과 함께 부서진 원본은 성 베드로 교회에 보관돼있다. 한편 리가의 시청광장은 500년 전에 처음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던 곳이며, 지금도 매년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 

시청 앞 광장에서 검은 머리의 집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성 베드로 교회(Svētā Pētera Evaņģēliski luteriskā baznīca)가 있다. 1524년까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였지만, 1526년부터 1940년까지, 그리고 1991년 이후로는 라트비아 복음주의 루터교 소속이다. 1209년 알베르트 주교가 이끄는 십자군이 예르시카 왕국을 점령한 뒤에 비스발디스(Visvaldis) 왕과 체결한 조약에 성 베드로교회에 관한 내용이 있다.

처음에는 종탑에 따로 있는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의 일부 벽과 기둥이 지금도 교회의 중간에 남아있다. 15세기 무렵 교회를 크게 확장했다. 독일 로스토크(Rostock)의 건축가 요하네스 루메쇼텔(Johannes Rumeschottel)이 로스토크의 성모 교회를 참고해 1408년 새 교회를 짓기 시작했는데 전쟁과 전염병으로 늦어져 1430년대에 마무리됐다. 

13세기에 지었던 최초의 교회는 1456~66년에 재건됐다. 1470년대에는 두 건물을 통합해 3개의 통로와 화려한 아치형 천장이 있는 거대한 성당이 만들어졌다. 1456년에는 낡은 종탑을 대신하는 새 종탑을 세웠고, 1491년에는 136m의 팔각형 첨탑이 그 위에 올려졌다. 안타깝게도 성 베드로 성당의 종탑은 1666년 3월 11일 무너져 이웃 건물을 파괴하고 8명이 사망했다. 

1671년 교회의 서쪽 정면과 새 탑의 건설 그리고 지붕과 아치형 천정 등을 개조하기 시작했는데, 1677년 5월 21일 리가 시의 대부분을 태운 화재로 파괴됐다. 1679년 9월 14일에 보수 공사를 마친 교회에서 첫 예배가 열렸다. 탑의 보수공사는 1686년에 시작됐으며 빈덴슈(Bindenshu)가 설계한 148m 구리지붕 첨탑이 완성됐다. 공 모양의 구조와 수탉이 1690년 5월 10일 첨탑 위에 세워졌고, 1692년에서야 교회의 개조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개조된 교회도 1721년 5월 10일 떨어진 낙뢰로 불타고 교회와 탑의 벽만이 남게 됐다. 곧바로 재건에 들어가 1723년에는 이미 지붕을 이었고, 1746년에는 120.7m의 첨탑을 새로 건설했다. 첨탑은 구리판으로 덮었고, 수탉은 1746~47년에 금으로 도금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대리석 강단을 설치했고, 본당 중앙 부분의 아치형 천장을 개조했다. 

1941년 6월 29일에 벌어진 포격으로 교회가 불타버렸다. 1954년 보존과 복원을 위한 연구를 시작해 1967~1983년 사이에 복원이 이뤄졌다. 1970년 8월 21일 역사적으로 7번째 수탉이 첨탑 위에 올려졌다. 1975년 7월에는 개조된 탑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통에 따라 시침만 붙어있다. 1976년부터는 라트비아 민요 ‘리가에 울려 퍼지다(Rīga dimd)’가 하루에 5번씩 연주된다. 교회 내부의 복원은 1984년에 완료됐다.

성 베드로 교회의 왼쪽으로 가면 브레멘 음악대를 형상화한 청동상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은다. ‘브레멘 음악대(Die Bremer Stadtmusikanten)’는 그림형제가 채록해 1819년에 출판한 독일의 전래동화이다. 농장에서 평생 동안 봉사해온 당나귀, 개, 고양이, 수탉이 나이가 들자 각각 동물의 농장 주인들은 하나같이 이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물들은 주인도 없고 자유로운 브레멘으로 가서 음악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각자의 농장을 떠난다. 브레멘으로 향하는 노정(路程)에서 만난 이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하기로 의기투합하게 됐고, 마침 만난 강도 일당을 혼내준다는 이야기다. 12세기부터 전해온 이야기의 원전에서 강도는 곰, 사자, 늑대 등이다. 

이야기의 무대가 된 브레멘에는 1953년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가 제작한 청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를 복제한 청동상이 밀워키의 린든 조각공원에도 있다. 리가의 성 베드로 교회의 뜰에 있는 브레멘 음악대의 청동상은 브레멘의 조각가 크리스타 바움가르텔(Krista Baumgartel)이 1990년에 제작한 것이다. 

리가의 자매도시인 브레멘의 선물이다. 소재는 ‘브레멘 음악대’에서 가져왔지만 1985년 4월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의 변화를 담고 있다. 리가의 브레멘 음악대는 창문을 통해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의 장막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브레멘 음악대와 작별을 하고 교회 뒷길을 따라가다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한자동맹의 상인의 집을 만나게 된다. 3층 건물의 지붕이 골목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지붕 아래로 도르래가 설치돼 있는데, 도르래를 이용해 3층에 있는 창고에 물건을 끌어올려 보관했다고 한다. 일종의 보안장치인 것이다. 가까이 있는 현대식 건물 바깥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재미있겠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의 반대편에는 리가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 2001년 10월 30일에 문을 연 박물관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7000점의 토기와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학생들을 위한 도자기 만드는 법과 같은 교육과정이 있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리가 도자기 박물관 옆 건물의 1층에 있는 통로를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리부광장(Līvu Laukums)으로 연결된다. 광장에는 문을 연 식당들과 카페 특히 길거리 카페가 사람들을 부른다. 도시의 모퉁이에서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영혼들이 다른 영혼들과 걸으며 고뇌를 청소하는 곳이 바로 길과 광장이라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리부 광장으로 이동한 것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광장에 서 있는 리가 러시아 극장의 2층에 있는 음악홀 로비에서 볶음밥을 곁들인 닭다리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아주 근사했다. 리가 러시아 극장의 공식 명칭은 미하일 체호프 리가 러시아 극장(Mihaila Čehova Rīgas Krievu teātris, 미하일라 체호바 리가스 크리에브 테아트리스)이다. 

1883년에 16명의 배우로 설립됐고, 러시아 밖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하는 가장 오래된 러시아 극장이다. 2006년까지는 리가 러시아 드라마 극장이라고 부르던 것을 2006년부터는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리가에서 활동하면서 라트비아의 극장과 공연예술에 큰 영향을 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체호프(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хов)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그는 의사이자 단편소설작가, 그리고 ‘갈매기(1896)’,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으로 유명한 극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의 조카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이며,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창립했고, 근대 연기론을 정립한 콘스탄틴 세르게이비치 스타니슬라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의 학생이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 반슈 다리(Vanšu tilts)를 통해 다우가바 강에 있는 중지도, 킵살라(Ķīpsala)에 있는 숙소 리가 아일랜드 호텔로 향했다. 반슈다리는 다우가바 강에 걸려있는 5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다. 길이 595m인 사장교로 소비에트 시절 건설됐다. 

1981년 7월 21일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사실주의 작가인 막심 고르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면서 고르키 다리(Gorkija tilts)라고 부르다가 젊은 라트비아 운동을 주도한 작가이자 교육자 민속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크리 자니스 발데 마르(Krišjānis Valdemārs)의 이름을 딴 거리로 개명되면서 반슈 다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숙소에 들어 짐을 풀고는 바로 옆에 있는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쇼핑센터를 찾았다.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를 대체할 새 운동화를 사야했기 때문이다. 아디다스 신발을 45유로에 샀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두 번째 이야기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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