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접근성 개선 [ 쿠키칼럼 ]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의 게임은 여전히 한정적

기사승인 2022-11-10 14:40:29
- + 인쇄
[ 쿠키칼럼 - 이유원 ]

대학교 3학년, 인디게임 팀을 막 결성했을 때 운 좋게도 대학에서 게임학 강의를 수강할 기회가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백남준아트센터로 간 견학이었다.

그곳에서 ‘필름을 위한 선’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영사기에 빈 필름을 넣고 재생하는 설치미술이었는데 게임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나에게도 그것이 게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리소스 부족에 시달리는 인디게임 기획자로서, 시각적인 표현과 화려한 연출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보는 즐거움은 분명 게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이것이 필수적인 것일까? 언젠가 시각장애인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낸다면 게임의 본질을 스스로 증명해낼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내 목표가 되었다.

2019년 출시한 '서울 2033'에서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복잡한 TTS 기술이 개발된 이후에나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건만, 이미 시각장애인 유저들이 보이스 오버 등 모바일 기기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보조 기능을 활용해 우리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이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X자 모양의 닫기 버튼, 중요한 변수를 표현하는 게이지 바 등 사용된 UI(User Interface, 유저 인터페이스) 요소들은 전통적으로 유저들의 편의성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유저는 아니었다. 텍스트나 이미지를 터치하고 쓸어 음성으로 인식하는 시각장애인 유저들에게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장벽이었다.

문제를 파악한 뒤 기존 유저 인터페이스 요소에 직접 음성 라벨을 달아주는 식으로 접근성 개선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이후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고, 인터뷰하기도 하고, 시각장애인 유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기도 했다. 시력을 잃기 전까지 게임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이제야 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게임이 생겨서 무척 기쁘다는 시각장애인 아버지의 메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실 당시엔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단순 반복 작업에 가까운 초보적인 작업이었고 직접 누군가가 귀띔해주기 전까진 잘 알지도 못하던 영역이었다. 사회적인 책임을 느껴서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숭고한 마음이 들어서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처음 의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작업은 큰 기업이나 기관에서 더 잘 해낼 것 같단 생각에 우리가 해놓은 것이 대단한 일인 양 알려지는 게 민망했다.

얼마 전, 영국 UCL 대학과 국내 연구진이 공동 주최한 워크숍에 키노트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다. 포괄적인(Inclusive) 디지털 박물관 혁신에 대한 워크숍이었는데, 박물관에 방문하는 시각장애인 관람객들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방법을 토의하는 자리였다. 참석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다시금 부끄러워지고,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자리에서 내 작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워크숍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하고, 노력하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나의 걱정과 다르게 우리 팀에서 진행한 개선 작업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줬다.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이스 라벨부터 크라우드 소싱 기반으로 좁은 실내의 구조를 설명해주는 앱, 충돌 거리를 감지하여 알려주는 서비스까지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기술의 발전이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문화계의 장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접근성 개선으로 민망해진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체감할만한 장벽의 변화는 적다.

나도 하나의 게임만 하면 며칠을 못 가 질리는데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여전히 한정적이다. 블리자드(Blizzard)의 인기 온라인 게임, ‘하스스톤’의 시각장애인 유저들은 한 유저가 직접 개발해 자체적으로 서비스하던 접근성 모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개발사의 지원을 받지 못해 게임사의 패치 대응에 어려움을 겪다가 지난 11월 4일부로 업데이트 중단을 선언했다.

워크숍을 마치고, 이 3년의 라이브 서비스 기간 여전히 게임을 지키고 있는 DAU(하루 동안 서비스를 이용한 순수 이용자)의 0.5%도 채 되지 않는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진심 어린 피드백을 천천히 다시 살펴보다가 그제서야 부끄러웠던 마음이 사라졌다.

완벽한 기술과 숭고한 마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은 관심과 의지만으로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기회가 많이 있다.

한편 블리자드는 9일 자사의 게임 '하스스톤'에 접근성 모드를 정식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부끄러운 접근성 개선 [ 쿠키칼럼 ]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yuwon@banjihagame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