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 시신’ 돌려쓰겠단 정부…“숭고한 문화 훼손 우려”

기사승인 2024-04-09 14: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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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 시신’ 돌려쓰겠단 정부…“숭고한 문화 훼손 우려”
서울의 한 의과대학. 사진=임형택 기자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로 해부 실습용 시신인 이른바 ‘카데바’가 부족해 의대 교육이 부실해질 거란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논란을 키우고 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사후 의대에 시신 기증을 서약한 가족들마저 “비현실적이다” “고인의 숭고한 뜻을 헤칠 수 있다”는 등의 우려를 쏟아내며 반발이 커진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카데바와 관련한 정부의 문제적 발언은 지난달 21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브리핑에서 나왔다. 이 자리에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의대 증원에 따른 카데바 부족 우려에 대해 “1년에 1200구 정도의 시신이 기증되며, 실제 의대에선 800구가 쓰이고 수량적으로 400구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카데바 부족 원인에 대해선 “현행 제도상의 문제”라고 했다. 기증자가 특정 기관(의대·병원)을 지정해 기증하다 보니 수요 불균형에 따라 생기는 문제라는 설명이다. 복지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장기·인체조직 기증과 시신 기증은 기증 목적부터 방식, 절차 등이 다르다. 장기·인체조직 기증은 다른 사람의 장기 등의 기능 회복을 위해 대가 없이 자신의 특정한 조직을 제공하는 것을 일컫는다. 반면 시신 기증은 의학 발전을 위한 해부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 제도를 손보겠다고 했다. 박 차관은 “기증자가 특정 기관을 지정해 활용하도록 하다 보니 어떤 학교는 카데바가 남고, 어떤 학교는 부족하다”며 “법령 등 제도를 개선해 기증 단계에서 특정 학교의 수요를 감당하고 남으면 다른 학교와 공유하고 재배분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 된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해 11월 복지부가 개최한 ‘연구 목적 인체 자원의 안전한 활용방안 심포지엄’에서 지방과 수도권 의대의 카데바 수급 차이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김인범 가톨릭대 의대 교수가 전국 의대·치대·한의대 52곳의 시신 담당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국내 시체 수급 상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23년 기준 34곳 대학 가운데 최근 5년간 연평균 시신 기증 건수는 가톨릭 의대가 319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밖에 50건이 넘는 곳은 경희대 의·치·한의대(62건)와 고려 의대(54건)뿐이었고, 대다수가 20건 미만이었다.

‘기증 시신’ 돌려쓰겠단 정부…“숭고한 문화 훼손 우려”
인제대 의대 학생들이 해부제를 지내는 모습. 이종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정책연구소장


“시신 기증 존중하는 문화 정착돼야”

법령 개정을 통해 카데바의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도록 물꼬를 튼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지만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일단 시신 기증 절차가 꽤 까다롭다.

대구가톨릭대 의대에 따르면 시신 기증 등록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생전에 기증을 등록해도 기증인 사망 후 실제 그 뜻을 실행하는 주체는 유가족이기 때문이다. 장례를 마친 뒤 유족의 동의를 얻었다면 시신은 상하지 않게 방부 처리된다. 가톨릭 계열 대학들의 경우 해부학 실습 전 교목신부가 시신 기증자를 위한 위령전례를 지내고, 매년 해부학 교육이 마무리되는 6월 중 유가족과 교육 담당 교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증자를 위한 미사를 갖는다. 이후 시신을 화장한 유골을 유족에게 전달하거나 대학 자체 봉안당 등에 안치한다. 기증자와 유족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제사인 해부제는 각 의대의 주요 행사이기도 하다.

정부는 법령을 고쳐 배분한 뒤 카데바가 부족하면 수입까지 고려한다는 계획이지만, 이런 방식에 대해 숭고한 기증 문화를 헤칠 수 있단 지적도 붙는다.

자신을 지난 1998년도 연세 의대 졸업생이라고 밝힌 맹호영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스스로 혹은 부모님의 몸을 사후 연세 의대에서 연구와 교육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서약했다”며 “고귀한 뜻으로 기증된 시신을 마치 도구로 보는 듯한 표현을 하는 사람이나 정부 부처는 의학 교육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기증된 시신이 부족해 고민하는 학교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신 기증자와 그 가족을 존중하고 감사히 여기는 문화가 먼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도 우려를 표했다. 이종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정책연구소장(인제 의대 전 학장)은 “시신 기증자와 그 가족들의 뜻에 반한 채 카데바를 다른 대학과 공유하는 건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카데바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방안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어 “해부학 실습은 단순한 실습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생명 존중과 기증자들의 숭고한 정신, 환자 몸의 소중함 등을 일깨우는 의학 교육의 시작점”이라며 “의사가 됐을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배우는 해부학 실습을 정부가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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