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 두번째 이야기

입력 2023-11-30 16: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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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
‘델프트의 풍경’ (1661, 캔버스에 유채, 98.5x117.5cm. 마우리츠 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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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의 풍경’ 중 신교회 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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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의 풍경' 중 동인도 회사의 지붕 사이로 보이는 구교회 첨탑 부분.

페르메이르의 작품, 파란 빛의 그림자 특히 두드러져

어느 미술사학자는 ‘델프트의 풍경’이 신구 교회가 함께 그려져 있으므로 종교의 자유와 공존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작품은 1661년에 그려졌다. 

이미 1579년에 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네덜란드는 개신교 교회로 통합되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부터 오라네 공 빌럼이 1581년 독립전쟁을 치르고 북쪽의 7개 주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신교도들이 마음껏 자신들이 선택한 개신교를 믿을 수 있어 플랑드르에서 이주해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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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무덤은 위치를 모르지만 구교회에 있다. 

델프트의 구교회(Old Church)는 1246년에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으로 시작되었다. 신교회가 지어질 때까지 델프트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었다. 구교회는 기초가 부실해 건물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구조적인 문제로 한쪽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536년 대화재와 종교개혁, 1654년의 대규모 화약 폭발 사고로 교회가 크게 손상을 입었다.​​

델프트의 개신교 교회로 네덜란드어로 새로운 교회(New Church)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성녀 우르슬라에게 봉헌된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개신교 교회로 바뀌었다. 1396년 착공하여 1496년에 완공된 종탑의 높이가 108.75m인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돌과 유리로 하늘에 닿고 싶은 인간의 열망과 역사를 담아낸 교회이다. 지하에는 네덜란드의 국부 빌럼 1세를 비롯 오라녀나사우 왕조의 왕족들이 안장된 왕실 묘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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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의 풍경’의 신교회 고딕 첨탑의 마티에르.

신교회(Nieuwe Kerk)의 탑은 ‘델프트의 풍경’의 배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다른 화가들이라면 섬세한 붓 놀림으로 그것을 묘사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썼다. 탑을 밝은 햇빛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 그는 밝은 노란색을 매우 유연한 방식으로 캔버스에 칠했다. 파란 지붕들 사이로 반사되는 노란색 벽은 인디언 엘로 물감으로 칠해졌다. 

이 물감은 인도에서 망고나무 잎을 먹인 신성한 소의 오줌을 가열하여 만든, 유산틴 산(euxanthic acid)의 노란색 안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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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현재 델프트 신교회(New Church)이고 오른쪽 사진은 맞은편의 시청사이다. 마르크트 광장(Markt Squaur)을 사이에 두고 신교회, 시청사, 로열 델프트 도자기 매장, 카페, 선물가게 등이 모여 있었다. 신교회의 첨탑에 올라가면 델프트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에서 파란 빛의 그림자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그의 초기 회화인 ‘장교와 웃는 여인’에서 여인의 흰 스카프와 블라우스의 그림자에 이미 파란색(라피스 라즐리)을 사용했고 빛에 노란색이 섞여 있다. 이는 그림자의 색에 대해 생각한 네덜란드 화가 사무엘 반 후구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ten)의 관찰을 상기시킨다. 

페르메이르의 그림 중 야외 풍경 ‘골목길’과 ‘델프트의 풍경’ 두 점 뿐

그는 관람자들에게 태양 빛과 푸른 하늘 빛의 차이에 주목할 것을 권했다. 하늘이 맑을 때 탁 트인 들판의 그림자는 완전히 파란 색이라고 썼다. 그는 태양만이 중립적이고 색을 띠지 않는 빛을 발하지만, 다른 빛은 푸른 하늘이 푸른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 빛에 자신의 색을 보태는 반사에 불과하다고 이 현상을 설명한다. 대조적으로 태양이 동틀녘이나 황혼에 안개를 통해 비칠 때, 마치 빛이 특정한 색을 띠는 것 같은 효과가 생긴다.​​

야외 풍경을 담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골목길’과 ‘델프트의 풍경’ 두 점만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판매 카탈로그에 따르면 그는 세 번째 ‘몇 채의 집들에 대한 풍경’도 그렸지만 이 작품은 300년이 넘는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는 두 점의 그림은 페르메이르가 도시 풍경이라는 장르에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어떻게 자신을 구별했는지를 보여준다. 

‘골목길’은 하나의 독특한 집의 친밀한 축소판에 초점을 맞추지만, ‘델프트의 풍경’은 페르메이르의 고향 도시를 더 넓게 보기 위해 축소된다. 

두 작품에서 그는 매일 분주한 움직임이 평화와 평온을 향하는 소박한 네덜란드 거리와 운하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맞물려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 또한 고요하고 순간적으로 멈춘 듯 보인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도시 풍경만큼 17세기 유럽의 어디에도 북부 네덜란드만큼 도시화된 사회는 없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
‘골목길’. 1658~1659, 캔버스에 오일, 54.3x44cm,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엄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오지 않았다. 델프트에서 동시대에 활동하며 가정생활을 그린 페테르 데 호흐의 그림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 열린 문을 통해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는 청색치마를 입은 여인이 보인다. 문을 열어 놓고 가사에 열중하는 여인의 모습은 운하를 따라가다 흔히 볼 수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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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의 배경으로 추측되는 여동생의 집인 델프트 플라밍 거리 40-42번지.

호이카더 거리에서 바라본 델프트의 풍경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처럼 빛나지는 않았다. 화가들은 같은 풍경이지만 가장 의미 있는 양상들에 집중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관에 가서 섬세한 감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을 보며, 인식을 확장하고,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소한 물체나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시선과 사유를 간직하게 되며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며 조금씩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델프트는 페르메이르로 인해 이젠 나에게 의미 있는 도시가 되었다.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