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

​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난 파리 시기의 자화상

입력 2023-12-11 11: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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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표현력 있고 다채로운 작품과 다사다난했던 삶은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영감을 준다.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단 10년(1880~1890)이었고, 그 동안 유화 900여 점과 1,100여 점의 스케치를 그렸다. 전반기 5년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그림을 배우고 습작을 하는 시기임을 감안할 때 불꽃처럼 타오르며 ‘영혼과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의 예술은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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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화가로서의 자화상, 1887~8, 캔버스에 유채

녹색 눈, 빨간 수염, 이랑 눈썹, 파란 작업복, 때론 모자를 쓰고 있거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이 그의 자화상의 특징이다.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예술가와 대면한다.

그러나 반 고흐의 자화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색, 붓질, 그리고 얼굴 표정의 연구를 위한 습작이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18점의 자화상이 소장되어 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
1873년 1월 19일, 19살 청년의 반 고흐, 반 고흐 미술관에는 성인 시절이라고 검증된 그의 사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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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7,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자화상은 한 작품을 빼고 전부 화가로서의 자화상이며 그는 이젤을 앞에 두고 확신에 찬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젤 앞에서만 약간의 생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양미술사에서 자화상은 두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알프레히트 뒤러(Albercht Durer, 1471~1528)의 자화상이 ‘예술을 하는 화가로서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나타냈으며,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적인 자화상이 한 축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바로크를 대표하는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뒤를 이은 반 고흐처럼 자아를 성찰하는 부류의 자화상이 다른 하나이다.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를 보면, 그는 27살이 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며 제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돈도 벌지 못한 불행하고도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성도 떨어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충동적이고 무모한 행동을 벌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반 고흐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실패자가 된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반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과 우울증의 가족력이 있고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마치지 못하면 스스로 밖에 나가 서 있는 벌을 받을 정도로 강박증이 심했다.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화구를 구입하고 모델료를 지급하고 나면 한 달에 겨우 두어 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으니 항상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부주의해지기에 이따금 엉뚱하거나 충격적이어서, 반 고흐의 행동은 관습과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의 '영혼의 편지1, 2'를 읽다 보면 한양대 정민 교수의 책 '미쳐야 미친다'가 절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반 고흐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 가꾸는 일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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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7, 카드보드에 유채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장 심오한 실존적 감정을 직접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새로운 종류의 표현 방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예술가였다.

“테오에게, 지금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언젠가는 거기에 사용된 물감보다, 그리고 내 인생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쓴 1884년 10월 24일 편지에서 우리는 투철한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7)
빈센트 반 고흐,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7, 44x37.2cm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에서 반 고흐는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해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파리의 코르몽(Fernard Cormon) 화실을 함께 다닌 하트릭은 "빈센트가 다른 사람보다 옷을 잘 입었다"고 회고했다. 파리에서 점묘법으로 표현하는 쇠라(Geoges Seurat)와 시냑(Paul Signac)을 자주 만나면서 색채와 빛에 대해 네덜란드 시절보다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창의적이고 회화적인 기법을 작품에 적용하며 점점 나아졌다. 그리고 반 고흐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긴 색선(色線)을 이용하여 자신 만의 기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배경에 후광처럼 그려진 원형이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시기의 대표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이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 반 고흐에게 동생 테오는 "파리에 와서 당시 새로운 사조이며 밝고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또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테오의 권고에 따라 반 고흐는 파리에 왔고, 그와 처음 만난 장소도 루브르였다. 반 고호는 그곳에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색조에 매료되었다.

1884년부터 이미 그는 “색채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라고 테오에게 편지를 썼으며 쿠르베의 초상화조차 사실주의가 아니라,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 데 주력한 표현주의적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파리 시기는 반 고흐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그려진 시기이다. 반 고흐의 작품 시기는 크게 네덜란드 시기와 프랑스 시기로 구분하고, 프랑스 시기는 체류했던 도시에 따라 파리, 아를, 오베르쉬르우아즈 시기로 세분한다.

파리 시기 2년 동안 25점 자화상 포함하여 230점을 그렸으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그린 자화상은 90점이 된다.

파리 시기는 네덜란드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 형태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터득한 필치를 기반으로 자신의 얼굴을 주제로 선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