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13세 소녀가 보낸 혼란과 증오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기사승인 2021-06-03 07: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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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리뷰] 13세 소녀가 보낸 혼란과 증오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영화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3년 전, 레슬링을 하는 남편과 어린 딸을 가진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당시 미성년자였던 소년 유레이(이감). 미성년자에게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 법에 따라 유레이는 3년 형을 마치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며 살아간다. 우연히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한 가정이 망가지고, 범인은 벌을 받았다.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이 사건은 여성의 딸인 리자허(등은희)에 의해 다시 현재로 소환된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감독 주순)은 청소년 범죄를 당사자나 피해자의 현재 시점이 아닌 3년 후 피해자 가족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유레이의 얼굴을 기억하는 리자허가 그를 우연히 마주치며 복수를 꿈꾼다. 정체를 숨기고 유레이와 가까워지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리자허는 쉽게 복수를 실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쌓인 증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과거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중국 청춘 로맨스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인물에 집중시키는 4:3 영상으로 전달되는 영상엔 청소년기 소년·소녀들이 발산하는 묘한 열기와 가슴 아린 성장통이 가득하다. 언뜻 유레이와 리자허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해 로맨스로 흘러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 같던 영화는 숨겨진 리자허의 사연들이 조금씩 공개되며 기분 좋게 관객을 배신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본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전개 방식은 강한 몰입을 이끌어낸다.

[쿡리뷰] 13세 소녀가 보낸 혼란과 증오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영화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스틸컷

살인사건과 그로 인한 리자허의 복수심, 증오심이 전면에 드러나도 전반적인 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리자허가 품은 유레이에 대한 반감이 이해와 공감으로 바뀌며 극단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청소년 범죄를 사회가 어떻게 다뤄야 하고 피해자 가족은 어떻게 느끼는지를 그리는 대신, 피해 가족인 청소년의 시각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13세 소녀의 시점을 보여주려는 감독이 치열한 고민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리자허는 자신의 전부였던 엄마의 죽음, 그 후 부재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견뎌왔다.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범죄와 잘 모르는 타인, 그가 살아갈 세상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느리고 섬세하게 표현됐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로 모를 감정들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리자허의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가장 뜨거운 여름을 가장 차갑게 보낸 리자허의 시간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진한 잔상을 남긴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중국 감독인 주순의 데뷔작이다. 지난해 제23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배우 등은희에게 신인여우상을 안겼다. 같은해 열린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주순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순 감독은 인터넷에서 본 익명 게시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영화를 완성했다. 어머니가 아무 이유 없이 정신질환자에게 화상을 입어 가족이 파괴됐지만, 정신 병력을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는 소녀의 사연이다. 또 아주 하드코어한 스토리를 가볍게 써서 신선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작가 이언 매큐언 소설의 방식을 시도해본 결과이기도 하다.

오는 17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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