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 아내 "피난민증 들고 남편 찾아 한강 도강"

[전정희 편집위원의 '러브& 히스토리칼 사이트] 화가 박수근 부부와 강원 양구(3)
남편 눈 앞에 두고도 피난 트럭 내리지 못해 '안양 피난민수용소'로...

기사승인 2022-10-16 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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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요약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밖에 못 나온 가난한 화가 박수근과 춘천여고 출신 부잣집 신여성 김복순은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소재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해방되고 남북이 갈리면서 부부는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군의원과 면의원이 되어 활동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부는 목숨을 위협받는다. 김복순은 우선 남편을 서울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자신은 인민위원회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감시를 받는다. 북한 탈출을 결심한 김복순은…


화가 박수근에게 지혜로운 아내 김복순이 없었더라면…

화가 박수근 아내
아들을 안고 포즈를 취한 박수근 아내 김복순. 1950년대 서울 창신동 시절로 추정된다.

3편

“얏! 손들어!”

옆구리에 푹 총구가 들어왔다. 김복순(1922~1979·화가 박수근 부인) 너무 놀란 나머지 파르르 떨더니 잠시 정신을 잃었다. “아 죽었구나. 내 아이들은 어떡하나”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52년 6·25전쟁 중 김복순은 고향을 탈출했다. 서울 창신동으로 먼저 피난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성산 방공호를 나와 금성면소재지 집 앞 강을 건너자마자 붙잡히고 만 것이다.
화가 박수근 아내
박수근 북한 탈출 이후 그의 아내 김복순의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에서의 탈출 경로. ① 숨어 있던 방공호 ② 사선 남대천(금성천) ③ 박수근 부부가 살던 금성 읍내 ④ 당시 도로. 서남쪽으로가면 김화읍, 철원읍, 서울, 양구읍 가는 방면이다. 

복순은 인민군에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편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딸 인숙(당시 7세)과 두 아들 성남(4)을 데리고 오밤중에 길을 나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복순은 행여 등에 업은 성인이 울기라도 할까 봐 몇 번을 주의시켰다.

다행히 시동생(박원근) 내외가 탈출에 동행하였던 터라 의지가 됐으나 이렇게 쉽게 잡힐 줄 몰랐었다. 시동생은 탈출전 형수의 요청에 따라 “우리 형수가 반장님의 첩이 되면 어떻겠소”하고 공산당원이었던 반장, 즉 감시자를 따돌리고 그날 밤 탈출을 감행했다.

이들 일행이 방공호를 나와 5리쯤 걸었을 때 비행기가 금성 읍내 조명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김복순은 그것이 UN연합군 비행기라는 걸 알았으므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탈출의 최대 고비인 북한강 지류 남대천(=금성천) 가에 다다랐다. 강 북쪽은 중공군, 남쪽은 연합군이었다. 김복순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탱크가 지나간 물길을 따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화가 박수근 아내
박수근 태생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초입. 사진=전정희

“형수 휘발유 냄새가 나지 않아요.”

시동생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총구가 옆구리로 들어온 것이다.

복순이 정신을 차려 보니 기적처럼 유엔군 병사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유엔군 만세,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

그 서양 군인이 “OK, OK…”하며 복순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한국군 통역이 붙었다.

통역 장교가 “아니 아주머니 어떻게 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나올 수 있었느냐”라며 놀라워했다. 미군 장교가 “강가에 지뢰를 그렇게 많이 파묻어 놓았는데 어떻게 살아 건널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바로 탱크 길이었다.

연합군은 담요를 가져다주며 방공호로 안내하고 레이션 박스를 가져다주었다. 다음 날 복순은 미군 장교들에 의해 막사로 불려 나갔다. 그녀 앞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중공군이 어디 있으며 무기를 어디에 숨겨 놓은 것 같습니까?”

복순은 지도에 손가락을 대가며 본대로 들은 데로 답했다.

“아니 어떻게 지도 보는 법을 아십니까?”하고 미군 장교가 물었다.

“여학교 때 배웠습니다. 저는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케이, 오케이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김복순과 시동생 가족은 연합군의 배려로 피난민증을 받고 트럭을 타고 양구 읍내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달걀과 흰쌀밥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트럭에 실려 춘천 피난민 임시 대피소로 데려다주었다.

“누님 아니세요?”

대피소에서 주먹밥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한국군이 복순을 보며 놀라 말했다. 친정 남동생 영일의 동창이었다.

“누님, 수근 형님은 서울 창신동 영근(김복순의 큰 남동생) 형님 집에 계십니다. 누님과 아이들 소식을 몰라 매일 신문을 사서 보며 울고 계신다고 합니다.”
화가 박수근 아내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화가 박수근. 군복을 염색해 입은 옷으로 보인다. 

‘그 무렵 친정 동생 영근은 지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북한 체제에서 탄압이 심했어요. 그래서 6·25전쟁 전에 월남하여 창신동 국제택시회사 뒤 편에 살고 있었어요. 제가 남편을 먼저 탈출시키며 그곳으로 가라고 했어요. 저는 동생 친구로부터 남편이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쁘든지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고 싶었습니다.’(김복순 회고 중)

그러나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다. 38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피난민증을 쥔 이들은 춘천 피난민수용소에서 안양 피난민수용소로 이동이 결정됐다. 피난민증이 없다면 간첩으로 오해받고 식량도 받을 수 없던 때였다.

복순은 기차가 청량리역에 도착하여 트럭으로 이동할 때 창신동(현 흥인지문과 동묘앞역 사이)을 지나는데 자신들을 내려달라고 경찰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이북 출신은 안된다고 했다. 뻔히 남편과 동생이 사는 동네를 두고도 한강을 건너야 했다.
화가 박수근 아내
박수근 아내 김복순의 북한 탈출 경로. ① 고향 금성 읍내 ② 김화읍 ③ 남편 고향 양구읍 ④ 춘천(피난민 수용소) ⑤ 서울(창신동) ⑥ 안양(피난민 수용소)

‘그때만 해도 빨리 절차를 밟아 한강을 건너 창신동으로 가 남편을 만나야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나는 그때 한강을 자유로이 도강하는 줄 알았어요. 계절도 10월 말로 접어들어 쌀쌀한 기운이 돌아 하루라도 빨리 성남 아버지(남편)를 만나고 싶었죠. 그때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요. 치마는 찢어지고 머리는 이가 수북하고…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죠. 그러니 아이들 또한 어떠했겠어요.’ (김복순 회고 중)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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