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시간만 일하게 해달라’…정신건강 임상심리 수련생의 눈물 [쿠키청년기자단]

기사승인 2023-07-31 0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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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시간만 일하게 해달라’…정신건강 임상심리 수련생의 눈물 [쿠키청년기자단]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수련생이 수검자를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권혜진 쿠키청년기자 

“그냥 주말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매일 자정 넘도록 보고서를 써도 끝나지 않을 만큼 일이 많거든요.”

대학병원에서 3년간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수련을 받은 A(32·여)씨는 지난 시간을 지옥과도 같았다고 표현했다. A씨는 주5일 8시간씩 병원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 집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근무 시간에는 환자를 상대로 심리 검사와 평가를 진행해야 하다 보니, 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수련실습생들이 초과 근무를 당연시하는 환경에 내몰려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수련생이라는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근로 시간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수련과 근로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는 연간 1000시간의 수련 실습이 필수다. 2급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1년, 1급 자격증은 3년간 수련을 받아야 한다. 수련 실습 기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A씨처럼 주5일 8시간 근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수련실습처에서는 연간 1000시간의 수련을 근무로 인정하지 않는다.

올해 수련생 모집 공고를 올린 한 국립대 병원은 수련생 연봉을 1360만원으로 책정하기도 했다. 이는 연 1000시간의 수련 시간을 제외한 추가 근무 시간을 최저시급으로 환산해 책정한 금액이다.

최저시급으로 연봉 1360만원을 받기 위해서는 월 110시간을 근무해야 한다. 여기에 제외된 필수 수련 시간 1000시간을 더하면, 실습생에게 요구되는 근로는 연간 2320시간이 넘는다. 이는 2022년 기준, 한국 연평균 근로 시간인 1915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A씨는 수련생 과로가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했다. 실습기간 동안 A씨는 대체로 하루에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종합심리검사 하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발달 검사 하나를 맡아 진행했다. 종합심리검사가 없는 날에는 2시간짜리 보조 검사를 3개 이상 진행하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 기본 8시간 근무 중 심리 검사 진행에 6시간 이상 쏟는 셈이다. 근로 시간 대부분 검사를 진행하다 보니, 검사 결과 보고서 작성을 포함한 나머지 업무는 자발적 야근과 주말 근무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 수련 기간 중 A씨는 “주 5일 보고서를 쓰느라 자정 전에 퇴근한 날이 손에 꼽는다”며 “이마저도 주중에 다 못 끝내면 격주로 주말 근무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수련생에게 최저 임금이라도 지급하면 다행이다. 한 심리센터에서 1년간 수련을 받은 B(29·여)씨는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했다. B씨는 “개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센터는 무급 수련인 경우가 많다”며 “그마저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말했다. 대학원 졸업 후 임상심리사로서 일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한데,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련 기관이 적다 보니 열악한 처우를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B씨는 이러한 처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센터와 수련 감독자에게 건의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애초 입사할 때 무급인 것을 감수하고 갔고, 수련 감독자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자격증 취득에 불이익이 있을 것이 걱정된다는 이유에서다. B씨는 “슈퍼바이저와 수련생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과의 관계 같다”면서도 “수련감독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련감독자의 눈 밖에 나면 수련감독자가 보고서 내용을 꼬투리 잡거나, 통과를 시켜주지 않아 근무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B씨는 “엄격하고 수직적인 분위기 탓에 많은 수련생이 심리적 소진을 경험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현재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인 C(28·여)씨는 수련 실습을 시작한 이후로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또 별도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C씨는 “과도한 업무량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쳤지만,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C씨는 “수련생들도 근로자로서 대우받을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며 “근로 조건을 개선함으로써 수련생들의 인권이 보장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신보건 임상심리사 수련생들 근로 환경과 처우 개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는 공백인 상태다. 전공의 수련생 같은 경우에는 올해 초, 주 68시간 이상 근무를 제한하는 ‘전공의 과로방지법’이 발의되었다. 간호사의 경우에도 간호사 1명당 환자 수를 법제화하는 ‘간호인력인권법’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임상심리사의 경우에는 별다른 논의가 없는 상태다.

지난 3월 정신보건 임상심리사들의 처우 개선과 권익 보호를 위한 단체인 한국임상심리전문가협회가 만들어졌다. 협회 관계자는 “아직 시작 단계라 계획이 추상적이지만 계속해서 정신건강 임상심리사 수련생의 근로 조건 개선과 권익 증진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권혜진 쿠키청년기자 hannahkei@naver.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