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 있다 [쿠키청년기자단]

기사승인 2023-09-11 06: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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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 있다 [쿠키청년기자단]

악은 평범하다. 특별하기보다는 오히려 진부하다. 타인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은, 말하기와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다.

여성혐오 역시 끔찍한 범죄 기저에만 깔리진 않는다. 단순한 혐오 감정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의 삶이 그렇듯 여성이 경험하는 억울하고 당황스럽지만, 사소한 순간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젠더 질서가 변한 건 사실이다. 가부장제의 쇠퇴가 시작되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올라갔다. 때문에 여성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남성혐오나 성 대결 갈등 프레임에 의해 적대적으로 읽히며 공격받는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에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 2030 여성들은 쉽게 비난에 직면했다. 남성들도 똑같이 힘든데 오늘날 여성들은 불만만 많고 능력은 부족하다는 식의 담론이 이어졌다.

지난 6월21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3 세계 성별 격차 보고서 속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105위였다. 지난해보다 6단계 하락했다.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와 아름다운재단이 지난달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여성 직장인 3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희롱을 경험했다.

청년 여성 두 명을 만나 그들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한 여성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그들은 여성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이한 경험이라기보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에 가까웠다.

여성을 향한 동등하지 않은 시선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실습 중인 의대생 이지수(25·여·가명)씨. 이씨는 응급실 환자 중 자신을 아가씨로 부르는 중년 남성들이 많다며 불편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이씨는 출근과 동시에 흰색 가운을 입고 응급실로 향한다. 그럼에도 그를 부르는 호칭은 아가씨 혹은 간호사 선생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함께 실습하는 남학생들은 선생님으로 불렸다.

이씨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동료 여학우들이 모이면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심지어는 전문의 선생님들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주치의 000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씨는 “같은 가운을 입고 있어도 우리는 아가씨로 불린다”며 “여자라는 이유로 이런 말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루는 이씨가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진로 고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특정 과를 희망한다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그 과는 여자 안 뽑는다”는 반응이었다. 이어서 “여자보단 남자를 선호하긴 하지”라는 말이 이어졌다. 이씨는 당황했지만 남자 선배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를 물으니 여성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출산으로 인해 여성이 일을 못 하게 되면 남은 사람들의 역할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당직실을 같이 쓰기 불편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전공의가 남성밖에 없는 과에 여성 전공의가 들어오면 당직실을 같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불편한 게 당연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며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냐”고 했다. 여성의 결혼과 출산이 이유가 되는 상황도 납득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의도적 배제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동료 아닌 여성으로 치환되는 순간들

이공계 대기업에 재직 중인 김민주(25·여·가명)씨의 이야기다. 김씨가 공장으로 현장 근무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중년 남성 직원의 문서 작업을 도와준 적이 있다. 김씨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시에 가까웠다. 월급은 맞춰줄 테니 본인의 컴퓨터 일을 봐주는 경리 아가씨로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며 농담하는 듯한 발언이 이어졌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엑셀 일이나 봐달라”는 말에서 직장 동료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씨는 “똑같은 신입이어도 여성인 나에게는 처음부터 말을 놓고, 남성 신입에게는 높임말을 쓰는 직원도 있었다”며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힘든 취업 준비 기간을 거쳐 지금의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남성 상사의 무례함을 견디는 건 김씨가 감당할 현실이었다. 사적인 얘기를 나눌 틈이라도 생기면 김씨를 향한 대화는 남자 이야기로 채워졌다. 업무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중이었는데 대뜸 남자를 만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추측하며 대답을 강요하더라. 답을 피해도 ‘에이 맞네~’라며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김씨는 직장에서 종종 동료로서 나누지 않아도 될 대화에 대응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고 했다. 남성 동료들의 시선에 자신이 여성으로 비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때로 불편한 플러팅을 경험한 순간도 있었다. 눈이 건조해 깜빡거렸을 뿐인데 한 남성 상사는 “왜 나에게 윙크하냐”며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가 김씨와 눈이 마주칠 때면 수시로 윙크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어처구니없고 불쾌했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이씨와 김씨 모두 사회 초년생이자 여성이다. 그들이 경험한 현실 사회는 성별과 나이 권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김씨와 이씨는 사회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탓에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성적인 의미가 담긴 행동에도 초연해야 했다.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되는 무례한 순간을 감내하는 것이 그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정고운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 여성이 경험하는 여성 혐오적 현상에 대해 ‘마이크로어그레션 (microagress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먼지 차별’이라고도 불리며 일상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차별이나 편견을 말한다. 특히 전통적으로 소수자적 위치를 점유한 여성이 이러한 차별의 대상이 된다.

특정 행위자의 행동이나 말이 소수자에게 위해를 가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를 경험하는 대상은 불편감과 모욕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제도적 변화에도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이 여전히 잔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개인은 젠더나 인종, 민족과 같은 다양한 위치에 따라 마이크로어그레션을 경험하거나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당사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성찰적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진주영 쿠키청년기자 jijy85@naver.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