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1954년 마닐라대회 육상 1500m에서 깜짝 1위
‘마라톤 신동’으로 두각…올림픽에선 연속 불운
전용화 없어 신발 밑창에 폐타이어 붙이고 연습

기사승인 2023-09-13 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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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억 아시아인의 큰 잔치’ 제19회 항저우아시안게임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을 비롯한 45개국 대표선수들은 23일부터 16일간 40개 종목에서 483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일 예정이다.

태극전사들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대회에서 일본에 내준 종합 2위 자리를 기필코 되찾겠다는 각오로 막바지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대륙별 종합경기대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시안게임은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처음 개막했다. 그러나 한국은 6·25 전쟁의 포연에 휩싸인 상태여서 참가하지 못했고, 1954년 제2회 마닐라대회부터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때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출전 경비 마련조차 쉽지 않았다.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두고 선수 57명, 임원 24명의 대표단을 겨우 꾸렸다. 

그러면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금메달을 따낸 한국 대표 선수는 누구일까? 바로 최윤칠이다.  스포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귀에 익은 이름일 것이다. 1950년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송길윤에 이어 3위를 차지한 그 인물 맞다.

마닐라대회에서는 그의 주종목인 마라톤이 치러지지 않았다. 필리핀이 그때까지 마라톤 경기를 개최한 적이 없고, 날씨가 너무 덥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최윤칠 선수가 마닐라아시안게임 육상 1500m 경기에서 1위로 골인하고 있다

육상의 꽃으로 불리는 마라톤이 아시안게임에서 제외된 적은 마닐라대회와 1972년 제7회 테헤란대회 두 차례뿐이다.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란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마라톤 경기를 금하고 있다. 

최윤칠은 개막 이튿날인 5월 2일 육상 1500m에 출전했는데, 예상을 깨고 3분56초2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1호 금메달이었다.
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최윤칠 선수가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받고 있다.

당시 한 신문은 “이전 기록을 8초나 단축한 초인간적인 동양 신기록이며 마라톤 선수가 중거리 경주에서 우승한 것은 역사상 최초”라고 극찬했다.

그는 5000m에서도 1위에 1초 뒤진 15분3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용 운동화를 마련할 돈이 없어 신발 밑창에 폐타이어를 붙이고 훈련한 그가 연거푸 메달을 따내자 전쟁과 가난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모처럼 활짝 웃으며 환호했다.

1만m에도 출전한 그는 6000m 지점까지 선두로 달리다가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기권하고 말았다. 그를 맹렬히 뒤쫓던 일본인 선수 두 명도 지친 기색을 보이자 최충식 선수가 치고 나가 33분0초로 우승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8개, 은메달 6개, 동메달 5개로 일본·필리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최윤칠은 1928년 7월 19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10세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마라톤 신동’으로 불렸고, 해방 후 월남해 경복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마침내 1948년 런던올림픽에 한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하게 됐다. 최윤칠은 국내 대표 선발전에서 1년 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 서윤복에 이어 2위로 런던행 티켓을 따냈다.

한국 대표단은 기차, 배, 비행기를 갈아타며 지구 반 바퀴를 도는 20박 21일의 고된 여정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개막식에서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대표단 기수를 맡았다. 코치로 대표단에 합류한 그는 태극기를 들고 입장함으로써 12년 전 일장기를 달고 뛴 천추의 한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다.   

최윤칠은 8월 7일 마라톤에 출전했다. 38㎞ 지점까지 선두로 달렸으나 근육 경련이 일어나 결승선을 불과 3㎞가량 앞두고 기권했다. 
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1948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대표단 기수를 맡은 손기정 코치가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선수들의 5㎞ 구간별 랩타임을 담은 자료에도 최윤칠이 35㎞ 지점을 가장 빠른 2시간06분02초의 기록으로 통과했다고 적혀 있다. 함께 출전한 서윤복은 선수들의 집중적인 견제 탓에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 27위로 골인했다.

최윤칠은 2년 뒤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동료 선수들과 1, 2, 3위를 휩쓰는 쾌거를 이뤄내긴 했으나 그의 자리는 세 번째였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은 메달을 딸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불운은 계속됐다. 3위에 29초 뒤진 2시간26분36초의 기록으로 아깝게 4위에 그친 것이다. 4위까지가 모두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이전까지는 손기정의 2시간29분19초가 가장 빨랐다. 
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1~3위를 차지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왼쪽부터)

최윤칠은 레이스 도중 누군가 “현재 3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광복 후 올림픽 마라톤 첫 메달에 만족하자는 생각으로 순위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최윤칠보다 앞선 선수는 두 명이 아닌 세 명이었다. 순위를 착각해 잘못 알려준 것이다. 만일 제대로 알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는 1954년 일본 아사히마라톤대회에서 4위로 입상한 것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957년 보스턴마라톤 코치,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과 1960년 로마올림픽 코치 등을 역임하고 대한육상연맹 이사와 고문을 지냈다. 1970년과 1992년 각각 국민포장과 체육포장을 받았다. 2020년 10월 8일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열흘 앞 아시안게임...첫 메달리스트 최윤칠과 그 손자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수영선수권대회 하이다이빙에 출전한 최윤칠 손자 최병화 선수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KBS TV 화면 캡처)

최윤칠의 이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7월 말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수영세계선수권대회 하이다이빙 남자부 27m 종목에 우리나라 최초로 출전한 최병화 선수가 그의 손자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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