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부모가 돼야 했던 딸들 [눈떠보니 K장녀③]

기사승인 2023-10-03 0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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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부모가 돼야 했던 딸들 [눈떠보니 K장녀③]
20대 K-장녀와 50대 K-장녀가 장을 본 뒤 각자의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다. 사진=이은서 쿠키청년기자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위대한 여행자는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한국의 장녀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목적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의 여행길에 올랐다. 부모에겐 속 썩이지 않는 1등 자식이 돼야 했고, 동생에겐 든든한 부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렇게 위대한 장녀가 되는 대신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위대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아니면 ‘비참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쿠키뉴스 청년기자단은 맏이로 자란 2030세대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K-장녀(Korea+장녀)의 삶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한국 전쟁부터 산업화, 경제 호황, IMF 위기까지 한국 사회는 굴곡진 역사를 건너왔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은 산업화 시대를 거쳐온 장녀들의 삶을 함축한다. 시대가 변했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1인 가구가 늘며 가족공동체가 옅어졌다. 그러나 첫째로 태어난 청년 여성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K-장녀라고 부른다. 과거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장녀 정체성은 왜, 어떻게 2030 세대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동생과 부모의 어머니가 돼야 했던 맏딸들

13남매의 맏이인 배우 남보라(33)씨는 방송에서 K-장녀로 화제가 됐다. 그는 지난 4월7일 방영된 KBS 예능 프로그램에서 각종 반찬을 10인분씩 만들어 부모와 동생들에게 전했다. 남씨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가족구성원의 식사와 안위를 챙기는 모습은 부모 세대인 5060세대 K-장녀를 닮았다. 2030세대가 지고 있는 장녀 정체성의 역사는 5060세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73년생 오현주(50)씨는 2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한 탓에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뛰어갔다. 동생들의 밥과 간식을 챙기고, 놀러 나간 동생들을 데리러 가는 건 오씨의 일상이었다. “오락실에 간 동생들 잡으러 가는 게 일이었지. 엄마가 올 때까지 난 엄마 대신이었어.”

부모의 부모가 돼야 했던 딸들 [눈떠보니 K장녀③]
1998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여성 취업에 관한 태도. 그래픽=진주영 쿠키청년기자

5060세대 K-장녀들은 가부장제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 어려선 동생을 돌봤고 성인이 돼선 자녀와 부모를 보살폈다. 그들이 20대였던 1998년 통계청의 ‘여성 취업에 관한 태도’에 대한 조사 결과는 당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 여성이 계속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남자 23.1%, 여자 30.4%에 불과했다. 여성이 결혼 혹은 첫 자녀 출산 전까지, 자녀가 성장한 후에 직업 생활을 하거나 아예 가정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여성 취업 장애 요인으로 여성의 31.4%가 육아를, 10.8%가 가사노동을 꼽았다. 가족 내의 정서적, 신체적 돌봄 역할을 여성이 담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사회에서 멀어진 여성은 가정을 관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여성의 사회 경력은 남성에 비해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 살림을 잘 꾸려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는 게 여성의 책무로 여겨졌다. 자녀와 배우자를 넘어 친정과 시댁까지 여성의 돌봄 영향권 아래 있었다. 통계청이 1999년에 실시한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하루 평균 가정관리에 2시간21분을 더 썼다. 가족을 보살피는 데는 47분을 더 사용했다.

5060세대가 겪은 여성의 의무는 2030세대 K-장녀들의 삶에도 흔적을 남겼다. 어머니가 된 5060세대 장녀들은 ‘좋은 엄마’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정과 사회에서 분투했다. 업무가 가중되자 가사와 돌봄에 빈틈이 생겼다. 2030세대 K-장녀들은 자연스레 빈틈을 메웠다.

‘장녀 됨에 관한 자문화교육기술지(이은지, 2017)’는 어머니를 대신한 맏딸의 일기를 소개한다. 일기 속에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아빠와 달리 엄마는 일과 가사노동 및 자녀 양육을 동시에 잘 수행할 때 비로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마에게 역할이 가중되자, 누나인 나는 동생에게 엄마로의 역할, 대리 양육자 역할을 일부 수행하게 됐다. 엄마의 삶에 영향을 미친 성 역할 고정 관념과 가족 이데올로기가 나의 삶에 뚜렷이 연결돼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장녀, 가족을 떠받치는 기둥

장녀들은 여성 역할에 더해 첫째 역할도 해야 했다. 한국에서 사회 기본단위는 개인이 아닌 가족이다. 논문 ‘가족자유주의와 한국사회(장경섭, 2018)’는 “부양, 보호, 교육, 주택, 금융, 고용, 심지어 생산, 경영 활동이 한국 사회에선 가족 단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부모 세대는 노후 대비 대신 자녀 교육과 훈련에 투자해 새로운 유망산업 진출을 꾀했다. 자녀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은 곧 전체 가족구성원의 안녕으로 여겨졌다.

자녀들은 노후를 대비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부모 세대를 부양해야 했다. 특히 그 부담은 사회 진출이 빠른 첫째에게 가중됐다. 과거 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건 장남의 역할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장남, 장녀 구분 없이 첫째가 가족 부양 의무를 짊어지게 됐다. 여기에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에 적합하다는 인식이 더해져 장녀는 가족구성원의 경제적, 심리적 부양을 책임지게 됐다.

5060세대가 부모가 돼 자녀를 양육하면서 2030세대로 장녀 정체성은 대물림된다. 과거의 장녀는 동생들에게 교육자이자 보호자이며 양육자였다. 양보가 습관화되고 책임감이 넘치는 장녀다운 모습은 부모 세대에선 익숙하다. 때문에 장녀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부분들은 부모 자신도 모르게 장녀와의 관계에서 표출된다. 동생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을 가하고 장녀에게 유독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의 양육 태도가 K-장녀의 대물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진주영, 이은서 쿠키청년기자 jijy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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