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래프트 럼블’, 변화를 위한 블리자드의 ‘첫 수’ [쿠키칼럼]

기사승인 2023-11-09 10: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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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래프트 럼블’, 변화를 위한 블리자드의 ‘첫 수’ [쿠키칼럼]
‘워크래프트 럼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쿠키칼럼-이유원]

나는 게임 기획자답지 않게 의외로 내가 게임 플레이에 투자하는 시간은 적은 편이다. 그러던 내가 주말 동안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플레이했던 게임이 있다. 바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지난 3일 출시한 세로형 모바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SLG) ‘워크래프트 럼블’이다. 

올해 매출 증대를 기록했고, 지배 구조가 개편되는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블리자드에 대한 게이머들과 팬덤의 시선은 한동안 냉혹했다. ‘디아블로 이모탈’, ‘오버워치 2’, ‘디아블로 4’는 팬들이 그간 블리자드에 걸었던 기대가 컸던 탓인지 초반의 화제성이 무색하게 쌀쌀맞은 평가를 받았다. 워크래프트 럼블은 그런 추운 시간 동안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되던 프로젝트였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진행되었으나 외부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고, 필리핀에서 진행된 소프트 런칭도 타 국가 유저들에겐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글로벌 런칭조차 기존 블리자드가 보여주었던 대대적인 사전 마케팅 과정 없이 기습 출시했다. 심지어 예고된 출시 일자보다 하루 더 빨리 출시됐.

이름에서 드러나듯 워크래프트 럼블은 ‘워크래프트’ 지식재산권(IP)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주얼한 전략 게임이다. ‘미니’라고 불리는 피규어 컨셉의 워크래프트 세계관 속 병사들과 몬스터들, 영웅들이 살아움직이며 알록달록한 게임판 위에서 싸움을 벌인다. 간단한 조작 방법과 귀여운 아트 컨셉 때문에 게임이 매우 만만해보이는 것과 달리, 실상 그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다. 

워크래프트 럼블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모두 이전에 블리자드가 보여준 ‘블리자드가 잘 하는 것들’에 해당한다. 명확한 아트 콘셉트를 잡고 그 콘셉트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방식은 ‘하스스톤’을 닮았다. 또 지역 점령과 자원 관리라는 전략적인 깊이는 ‘워크래프트 3’를, 반복 노동이란 인상을 지우기 위해 PvE(플레이어 대 환경) 콘텐츠에서 선보이고 있는 다양한 기믹과 도전 요소들은 ‘스타크래프트 2’ 캠페인을 닮았다.

이외에도 캐릭터 육성의 폭과 방식, 기간 이벤트 및 기간제 과제의 종류, 전략이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고 직관성을 유지하게끔 만드는 여러 장치들은 모두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디아블로’ 시리즈, 그리고 특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주기적으로 연상시킨다.

‘워크래프트 럼블’, 변화를 위한 블리자드의 ‘첫 수’ [쿠키칼럼]
‘워크래프트 럼블’ 인게임 이미지. 

IP 자체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워크래프트 세계관의 지도를 가장 기본적인 PvE 콘텐츠의 주 무대로 삼는데, 실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레벨업 구간의 순서를 따라 해당 지역에 등장하는 보스와 몬스터들이 워크래프트 럼블의 상대로 차례로 등장한다. 주간 던전 역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존재하는 유명한 던전들을 재해석하여 디자인됐다.

뿐만 아니라 변화를 도모하는 블리자드의 ‘강력한 첫 수’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워크래프트 럼블은 더더욱 흥미롭다. 일례로 워크래프트 럼블의 상점에서는 일반적인 가챠 방식 대신 ‘G. R. I. D.’라는 독특한 상점 구매 방식을 제공하는데, 이는 연출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이나 피규어 워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게임 아트 컨셉을 지키면서 약간의 논리적인 흥미 요소를 배치하여 일반적인 가챠 방식이 그대로 간파되는 것을 방지했다.

또한 게임 초반에 제시되는 ‘아크라이트 부스터 패키지’는 모바일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영구적인 보상 증가라는 혜택을 붙이고 있으며, 그외 일반적인 현금 패키지 가격의 상품도 기타 SNG, 전략, 역할수행게임(RPG) 장르 게임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편이다. 디아블로 이모탈에서도 느꼈듯, PC 게임에서 모바일 게임으로 무대를 옮기며 필연적으로 자체 팬덤에서 발생하던 유저 저항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노골적인 과금 유도에 민감하고, 모바일 게임 비즈니스 모델(BM)에 익숙하지 않은 기존 팬들을 어떻게든 포섭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마케팅 면에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4년 만에 오프라인 행사로 돌아온 블리자드의 자체 행사, ‘블리즈컨 2023’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아슬아슬하게 블리즈컨보다 불과 길어야 하루 더 일찍 출시된 ‘워크래프트 럼블’을 지원하기 위해 행사 첫 날의 피날레 코너를 할애했다. 기존의 ‘선 예고, 후 출시’가 가져왔던 뼈아픈 부정적 반응들을 최소화하고, 혹시 모를 런칭 직후의 이슈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이때 공개된 내용은 워크래프트 팬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화산심장부’ 레이드가 워크래프트 럼블의 첫 시즌에 추가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쩌면 게임 기획자라서가 아니라, 블리자드 팬이라서, 나는 느낄 수 있다. 워크래프트 럼블은 시기적으로도, 새로운 진입측면에서도, 비록 블리자드가 티를 내진 않고 있어도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의 첫 수다. 블리자드 역시 그걸 매우 잘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임 내용 역시 블리자드의 게임들을 몹시 사랑하는 개발자들이 고민하여 만든 것이 느껴진다. 이번 작품으로 많은 것을 익히고 경험하여, 블리자드의 브랜드와 모멘텀은 지키되 새로운 시장과 유저 기대에 부응하는 또다른 ‘신화급’ 작품이 계속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워크래프트 럼블’, 변화를 위한 블리자드의 ‘첫 수’ [쿠키칼럼]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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