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처럼 관리 가능한데”…치료 잇기 힘든 혈우병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4-05-23 0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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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처럼 관리 가능한데”…치료 잇기 힘든 혈우병 [쿠키인터뷰]
14일 박한진 한국코헴회 회장은 “혈우병을 진단받으면 가족 구성원이 함께 치료에 동참해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잘 관리하면 어른이 돼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신대현 기자

혈우병은 희귀질환 중에서도 당뇨병처럼 관리가 가능하고 치료 경과도 좋은 편에 속하지만 낮은 인식 속에서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쉽다. 치료의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관리해 일상생활을 누리길 바라는 환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해 출혈이 잘 멎지 않는 희귀질환이다. 항체가 생겨 응고인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후천성 혈우병’이 드물게 있지만, 혈우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물려받는 ‘선천성 혈우병’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2500여명의 환자가 등록돼 있는데, 실제 환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혈우병은 부족한 응고인자의 종류와 결핍 정도에 따라 유형이 나뉜다. X염색체에 있는 응고인자 8번, 9번이 결핍되면 각각 혈우병 A, 혈우병 B가 된다. 혈우병 환자의 80%는 혈우병 A, 20%는 혈우병 B에 해당한다. 혈우병은 대부분 남성에서 발병하는데, 여성의 경우 X염색체가 2개이므로 둘 중 1개가 정상이면 혈우병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응고인자 활성도가 5% 이상이면 경증, 1~5%는 중등증, 1% 미만으로 거의 없는 상태는 중증으로 구분한다.

“혈우병 환자는 병과 함께 태어나 늙어간다.” 23일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맞아 최근 기자와 만난 박한진 한국코헴회 회장은 혈우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혈우병 환자단체인 한국코헴회의 시초는 지난 1994년 혈우병 환자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한마음회’다. 

이후 청년단체인 ‘고리회’를 거쳐 한국코헴회라는 명칭을 안고 30년 넘게 혈우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치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 회장은 응고인자 수치가 1% 미만인 중증 혈우병 환자다.

한국코헴회에는 혈우병 환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들이 많이 가입돼 있다. 아이가 별다른 이유 없이 여기저기 멍이 들어 병원을 찾으면 혈우병을 진단받게 되고 정보를 얻기 위해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박 회장은 가입을 독려하고 있다. 희귀병 특성상 잘못된 정보를 얻거나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혈우병이 있으면 자다가도 이곳저곳에 멍이 잘 드는데 병원에 갔다가 의사의 신고로 아동폭력 피해자로 오해받은 부모의 사례도 있었다”며 “어머니로부터 혈우병이 유전된다는 이유로 시댁과 남편에게 죄의식을 갖고 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이어 “혈우병을 진단받으면 가족 구성원이 함께 치료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잘 관리하면 어른이 돼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혈우병은 희귀질환의 일종이긴 하나, 치료의 길이 닫혀있는 것은 아니다. 희귀질환 중에서 치료 경과가 좋아 희망적인 축에 속한다.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관리하며 살 수 있고, 수명도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족한 응고인자만 주사하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응고인자를 제때 투여하지 않으면 미세한 출혈이 계속 발생해 관절 손상으로 이어지고, 악화되면 이른 나이부터 인공관절 등의 수술을 받아야 할 수 있다. 뇌출혈,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등도 대표적 합병증이다.

박 회장은 “혈우병 환자는 일주일에 2번가량 주사로 응고인자를 투여한다”며 “주사를 맞기 위해 학교나 회사를 빠지려면 눈치가 보여서 관절 출혈이 계속돼도 꾹 참는 날이 반복되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아직 혈우병 완치 방법은 없지만 신약 개발이 활발하다. 최근엔 몸속에 들어온 응고인자가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반감기)을 늘린 주사제가 많이 나왔으며, 부족한 응고인자가 몸에서 직접 만들어지게 하는 주사제도 개발됐다. 환자들은 효과적인 신약을 싼 가격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보험 급여 규정이 보다 유연해지길 바란다.

박 회장은 “예전에 약이 없을 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지금은 약이 많이 나오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희망을 갖게 됐다”면서도 “여전히 중증 혈우병 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아플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결혼이나 취업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또 “응고인자 수치를 20% 정도만 꾸준하게 유지해도 일반적인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며 “환자들이 좋은 약을 부담 없이 쓸 수 있도록 과감한 급여 정책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속적인 출혈로 인한 관절병증의 예방과 치료는 부족한 수준이다. 응고인자를 직접 투여하는 것보다 응고인자를 일정 농도로 유지하는 예방요법이 관절병증을 막기 위해 더 권장되지만, 예방요법을 시행하는 환자는 많지 않다. 한국혈우재단의 혈우재단백서에 따르면 혈우병 A 환자에서 예방요법 시행율은 49.8%, 혈우병 B의 경우 40.3%다.

응고인자 예방요법에 사용되는 치료제로는 미국 제약사 화이자의 혈우병 B 치료제인 ‘베네픽스’(성분명 노나코그-알파), 사노피-아벤티스 코리아의 혈우병 B 치료제인 ‘알프로릭스’(성분명 에프트레노나코그-알파) 등이 있다.

치료 환경 개선도 과제다. 아이도, 성인도 혈우병이 발생하면 소아청소년과에서 치료받는다. 박 회장은 “성인 혈우병 환자도 소아청소년과에서 진료받는다. 아이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 왔다며 저를 막아 세웠던 경험이 많다”면서 “환자들이 치료를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번거롭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진료를 꺼리지 말고 꼭 관리를 받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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